[보도자료] 전쟁의 아픔도 잊게 해준 고상현 목사의 특별한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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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보도자료] 전쟁의 아픔도 잊게 해준 고상현 목사의 특별한 인연들

최민수 0 855 2015.10.2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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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뉴스투데이 발췌

전쟁의 아픔도 잊게 해준 고상현 목사의 특별한 인연들

베티 브래디,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하나님

기자명 : 김성화 기자 입력시간 : 2015-07-20 (월) 16:51

광복 70년, 분단7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난 지 한 세기가 다되어 가지만, 여전히 그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단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뿐만이 아니라, 조국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바다 건너 베트남에서 전쟁을 겪은 참전 용사들도 많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아 그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하지만 그런 이들이 있기에 우리가 당시를 더욱 생생히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를 통해 참전 용사들의 헌신과 희생, 애국심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인 고상현 목사는 전쟁 당시를 떠올리면 너무나 고통스럽다. 어쩌면 살아서 돌아온 것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부상을 당해 삶을 끊을 생각도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잡아줬던 한줄기 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고상현 목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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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전쟁과 끔찍한 부상

1967년 귀국을 앞둔 시기였다. 맹호부대 1연대를 지원하는 60포병대대 통신 중대에 속해있던 고 목사는 그해 11월 베트남 풋캇산 986고시를 중심으로 한 수색 작전에 투입됐다. 지리적 이점과 공용화기를 이용한 적군의 반격이 있었지만, 맹호부대 제1연대는 월맹군을 사살하고 소총들을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며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11월에 시작된 작전은 이듬해 1월까지 이어졌다. 1월은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인 구정 공세가 벌어지는 시기다. 이 시기 맹호 제1연대 1대대 3중대는 공격임무를 명받고 장갑차를 중대지휘소로 진격하여 최전방선두에서 월맹정규군 주력부대인 3사단 18연대 9대대를 압박해 들어갔다. 만약 맹호3중대가 패한다면 한국군 맹호부대 전체 사기가 저하되는 치욕을 면할 수 없게 되는 막중한 공격 임무였다.

구정 공세답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맹호3중대는 월맹군 제9대대를 전명시키며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전투지를 돌아보며 마무리를 하는 과정에서, 숨어있던 적군들이 3중대지휘소 장갑차를 B-40 적탄통으로 발사한 것이 명중되면서 중대 본부지휘소는 화염에 휩싸였다. 이로 인해 고 목사와 손태익 중대장만이 살아남았다. 이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리핀 엔젤레스 클라크 미 공군병원으로 급히 후송 했으나, 손 중대장은 후송도중 안타깝게 순직하고 말았다. 후에 손 중대장은 2008년 보훈처에서 선정한 전쟁영웅으로 월남 참전 전쟁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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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전쟁의 상처
고 목사도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 당시 고 목사는 자신이 부상을 입은 줄도 몰랐다. 화염에 휩싸인 중대장을 돕기 위해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손과 팔이 불타고 있음을 느끼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화상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다. 고 목사는 당시를 생각하면 여전히 그 고통이 느껴지는 듯하다. 피부에 달라 붙어버린 군복을 벗기는 순간은 마치 짐승 가죽을 벗기는 듯 했다. 주사를 찌를 곳도 없어, 마취도 없이 온 몸을 소독을 하면 아파서 악을 쓰고 소리를 칠 수밖에 없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쳐오는 순간이다.

고통을 더욱 배가 시키는 것은 낯선 땅에 달래줄 이 하나 없다는 사실이었다. 거들떠보는 사람도, 위로해 주는 사람도, 달래주는 사람도 없이 낯선 이국땅의 병실에 한국 사람은 고 목하 한 명 뿐이었다.

세상에 오직 홀로 아픈 날들을 눈물로 지새우던 시기, 백의의 천사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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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브래디
화상으로 인해 살 썩는 냄새가 독방에 가득차면 아무도 접근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지내며 고 목사는, 스스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자결 하겠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고 목사의 손을 잡아준 이가 있었다. 지금도 너무나 그리운 이름, 베티 브래디(Betty Brady) 간호장교 중위였다.

브래디는 고 목사의 부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돌봐줬다. 아픔으로 몇 날을 잠도 자지 못하고 지새운 고 목사에게 브래디의 손길은 그보다 더 포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팠던 소독과 치료의 과정도 브래디의 보살핌에 점점 더 견딜 만 해졌다. 브래디는 간호장교라는 의무를 초월하여 어머니 같은 손길로 정성스러운 간호를 해줬다. 아프다고 하면 피와 염증이 묻어나는데도 거리낌 없이 꼭 안아주며 환한 미소를 보여주던 브래디에게서 고 목사는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얼음처럼 차갑고 인정 없는 병원에서 인간 대접의 사랑과 정성스러운 손길이 상처를 보듬고 아픔들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브래디는 화상의 고약한 냄새 속에서도 단 한 번 얼굴을 찌푸린 적이 없었다.

그런 브래디의 간혹 덕분인지 고 목사의 경과는 급속도로 좋아졌고,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브래디는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새벽 4시부터 미리 병원복도에 나와 고 목사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고 목사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브래디는 떠나는 고 목사를 향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

떠나기 전 브래디는 연락을 하라며 주소를 건네줬다. 한 통의 편지를 받았지만, 고 목사는 한국에서 끔찍한 얼굴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 차마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제대를 하며 소식이 끊어졌다.

고 목사는 여전히 브래디가 있었기에 지금의 고 목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항상 브래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지금도 브래디와 이별했던 1968년 4월9일 새벽이 잊히지 않고 있다. 언제나 그때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영화 필름처럼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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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감사한 대통령과의 인연
참전 용사였지만, 사회에서의 대우는 차갑기만 했다. 화상으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거기에 고 목사는 부끄러움과 억울함과 반항심에 인생을 막 살아가고 있었다. 전쟁과 의학적으로 살 수 없다는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며 살아남았지만, 사람들은 ‘괴물’ 아니면 ‘문둥이’로만 바라봤다.

사회의 뒤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던 나날, 고 목사는 희망이라도 가져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1970년 겨울 어느 날, 성형수술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꼬부라진 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써서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런 고 목사를 청와대로 초청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보여줬다.

청와대에서 만난 대통령은 월남전에서 전상을 입은 것을 치하하며 위로해 주셨다. 함께하신 육영수 여사는 “내가 이 손으로 전국 나환자들을 다 악수하고 다녔다”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분이 “이 사람은 나환자가 아니고 월남에서 화상을 입어서 그렇습니다”며 설명해 주자, 영부인은 실수에 당황해 하며 사과하고는 고 목사를 껴안아 주었다. 그 순간 고 목사는 울음이 터져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이 장면을 보시고는 고 목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라고 지시했다. 그 덕분에 고 목사는 손가락 정형수술과 얼굴 성형 수술을 청와대에서 지원해준 돈으로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사연을 들은 장상숙 원장은 대통령께서 주신 수술비를 받을 수 없다며, 수술비 전액을 자립하는데 쓰라며 돌려주기도 했다. 이러한 사연들은 언론을 타기 시작했고, 고 목사는 그동안 받지 못했던 관심과 따뜻한 위로를 한순간에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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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방향을 잡아준 하나님
고 목사는 앞선 인연들로 삶의 희망을 가지기 전까지 수십 번 삶을 포기하고자 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을 까 하늘에 대고 원망하기도 했다.

시련은 견딜 수 있는 자에게 부여한다고 했다. 지금 고 목사는 수많은 인연들을 뒤로하고 홀연히 영생의 나라 아침에 섰을 때 “잘했다 충성스런 종아!” 이 한마디를 듣는 것이 삶의 방향이 됐다.

고 목사는 미국 이민목회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서의 인연을 잊지 못한다. 주정부 허가를 받아 “미주초장교회”를 성동들과 친인척들로 아름다운 교회를 설립하여 주일을 준비하고, 토요일이면 한 주간 동안 먹고 마실 것들을 성동들이 차고 넘치게 채워주었던 이들을 잊을 수가 없다.

미국 목회생활 중에도 전쟁의 상처를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밤이면 온몸이 쑤시고 아파오는 고통에 잠을 못 드는 나날이 여전했다. 밤마다 아파오면 찬송하다 성경보다 기도하고 울어대는 수많은 나날들이 지나가는 순간, 그 아픔으로 한국으로 가라는 소명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고 목사는 한국으로 돌아와 목회를 시작했다.

한국 목회 생활의 초기 어려움을 딛고 고 목사는 어엿한 한 명의 심부름꾼으로 목사 일을 행하고 있다.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의 흔들림도 사라졌다. 지난 인연들을 생각하면 하루하루 허투루 살아갈 수 없었다. 따라서 저 위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소명을 던져주고 있기에 한가할 틈이 없다.

전쟁의 아픔을 달래준 소중한 인연들, 고 목사는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새기고 있다. 이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인연들일지라도 고 목사의 삶이 계속되는 동안 언제나 함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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