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좀 도와주세요. 부탁합니다.방법이없습니다. 이야기를 다 쓰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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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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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자 3 1,118 2006.06.0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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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정 춘자입니다.
내용이 지루하고 길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저는 제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합니다. 오빠이름은 정00입니다 서울시 송파구 가락2동 극동아파트 3동  에서 (김00)부인과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행복하게살고계십니다. 아들은 얼마전에 장가를 가서 벌써 아이를 낳았다는군요

제가 막내이긴 했어도 오빠가 외아들이라서 부모님은 늘 오빠에게만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오빠는 늘 모범생이었고 공부도 잘해서 서울대학 공과 대학 전기과를 졸업했습니다. 작은언니도 공부를 잘해서 고등학생 때부터 담임선생님 댁 에 머물면서 선생님의 아이를 가르치면서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어려운 집 살림을 꾸려갔습니다. 그런 이유로 언니는 느지막하게 33살 때 결혼했지요.

아버지는 오빠가 대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 목수 일을 하시던 중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1년 동안 앓다가 1970년 3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삶도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아버지 고향은 이북 평안북도 정주였는데 고향을 무척이나 그리워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제 나이는 겨우16세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작은언니와 함께 모은 돈으로 홍제동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온가족이 그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때가 유일하게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제게는 불행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후에 오빠는 호남전기회사에 입사해서 다닐 때 만난 여인과 식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고, 회사일로 오빠 가족이 외국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오빠가 결혼을 해서 외국에 나가기 전까지 약5년 정도 함께 살았고, 그러던 중에 저는 피부건선이라는 피부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저를 벌레 보듯이 천하게 여기고 께름칙하게 여기면서 저하고는 살 수 없다고 해서 그 이후로는 혼자서 살게 되었지요. 저 또한 오빠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독립 을 해서 방 한 칸을 얻어가지고 신림동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DJ를 하면서 지내
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나이가 31살 때였습니다.

그 후 엄마는 오빠 집 에서 머물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더군요. 작은언니 집 에 오면 엄마가 올케한테 서운했던 거를 이야기를 가끔 했나봅니다.

엄마를 아주 더러운 듯이 부엌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도하고 또한 손자 손녀가 사랑스러워서 외출했다가 돌아오실 때는 없는 돈을 아껴서 빵이랑 과자를 사다가 주면 어느새 그것들이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답니다. 시어머니가 사다 준 것은 더럽다는 거죠. 엄마는 그것들을 몰래 다시 꺼내서 눈물을 흘리면서 잡수셨다고 합니다.
오빠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며느리에게 갖은 서러움과 눈치를 받고 살았을 뿐 아니라 인격적인 대우조차도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며느리에게서 온갖 상스러운 말과 삿대질까지 받으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더러우니 자식들에게 할머니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말이 없으신 분 이어서 작은 언니 외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거죠. 아들에 대한  많은 배신감과 절망, 그리고 잘못 키웠다는 후회를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오죽 하면 오빠를 정씨가 아니라 김씨(올케의 성씨) 라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오빠 앞에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작은 언니나 큰언니한테 그리 말씀하시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오빠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말 답답합니다.

오빠 가족이 귀국할 당시의 일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다리수술을 하고 있으면서 오빠를 몹시도 그리워하면서 연락을 취해보아도 연락도 두절되고 소식이 깜깜했었습니다. 알고 보니 오빠는 한국에 계시는 엄마가 기다린다는 것조차 잊은 채 유럽여행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전화도 없이 ... 그런데 어느날 오빠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귀국해서는 어머니께 홍제동 집 을 독채로 전세를 놓고 자기집식구들은 송파구 가락2동 에 있는 극동아파트를 사서 이사 간다 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홍제동 집에 방 한 칸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가 오빠 집 에 있으면서 숨통이 막혀서 살수가 없고 오빠가 아버지가 남겨놓은 재산을 주지 않을까봐 노심초사 하셨지요. 걱정을 많이 했지요. 막내인 제가 늘 마음에 걸리신 어머니는 저와 함께 살 방이라도 있어야겠다싶어서 오빠에게 사정사정을 했지만 오빠는 안하무인격으로 일언에 거절했고, 엄마는 홍제동 집 연탄 광 에서 추운 겨울날 구둘 장도 없는 탄광에서 두 달 을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 당시 심하게 건선이라는 피부병을 앓고 있는데다가 막내가 시집도 못가고 밖에서 고생하고 있으니 안스러워서 따뜻한 방 한 칸이라도 있으면 막내하고 함께 살겠다고 그렇게 오빠에게 사정사정을 했는데도 오빠는 눈 하나 꿈쩍도 하지 않았고, 어머니께서 불도 안 들어오는 차디 찬 연탄 광에서 두 달을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들여다보거나 걱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쓸쓸하게 연탄 광에서 사시다가 지난 86년도 큰언니네 다니러갔다가 홍제동 연탄 광 집으로 돌아오시다가 길에서 쓰러지셔서 뇌출혈로 객사하셨습니다.

오빠는 홍제동집을 자기 멋대로 처분해서 아들의 장가밑천으로 썼습니다. 그 홍제동집은 작은언니의 피와 땀과 청춘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집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린시절 공부까지 시켜준 작은언니를 배신하고 제멋대로 집을 팔아치웠습니다. 형제들이 버젓이 있는데, 그것도 작은언니의 공이 500%나 들어간 명실공히 작은언니의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작은언니에게는 피와 땀의 결정체였던 그 집을 형제들에게 의논 한 번 하지도 않고 혼자 몰래 팔아서 아들 장가 밑천에 썼다는 게 납득하기 어렵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빠는 10억이나 되는 집이 있는데도 부모님이 남겨놓은 재산을 오빠 혼자서 몰래 팔아서  몰래 혼자 가졌다는 것이 너무 억울합니다. 동생은 집도 없고 지금 병들어 비닐하우스에서 있는데도 눈 하나 끔쩍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헤어졌던 형제들을 찾아 헤메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는 것이 사람사는 모습이고 인지상정 아니던가요?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오빠한테 나쁜짓을 하거나 괴롭히거나 체면을 사하게 한 적이 없었고, 게다가 오빠와 나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만날 정도로 남남처럼 살았습니다. 그것도 20년 만에 제가 입원한 병실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그사이에 내가 오빠한테 찾아가서 귀찮게 한 것도 없고 아무리 아파도 오빠한테 손 내밀지도 않았고 오빠는 제가 심장병에 걸렸는지조차도 몰랐었지요. 죽을 때 오빠를 찾는게 뭐가 잘못입니까? 형제를 찾는 거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 그런데 오빠는 오지도 않고  죽기를 바랬던 사람처럼 수차례 연락을 해서 겨우겨우 왔었지요.

동생인 저는 갑산성과 피부건선을 앓고 있고 게다가 심장판막수술까지 했는데도 지저분하고 정말 환자가 살 수 없는 비닐하우스에 살게 하고 오빠는 아무렇지 않게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정말 화가 납니다. 부모님이 남겨놓은 재산이 오빠혼자 쓰라고 남겨 주신것은 아니거든요? 더군다나 75세 되는 엄마는 혼자서 홍제동집 연탄광에 사시면서 막내 딸 몫을 찾으려고 시위하다가 길에서 객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억울해서 이 글을 씁니다.

우리 언니들과 저는 오빠한테 그 집을 팔라고 허락하지도 않았고 또한 오빠이름으로 올리는데 동의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이니깐 엄마는 믿었고 혼자서 다 가지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엄마는  오빠의 이기적인 모습에 실망하셔서 제 몫이라도 찾아주시려고 혼자 시위하다가 돌아가셨던 겁니다

오빠는 평소에 저를 무척이나 창피해하고 벌레보듯이 했습니다. 공부도 못했던 동생인데다가 건선이라는 피부병까지 앓고 있어서 가까이하기조차도 싫어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가 오빠에게 방한 칸을 달라고 사정사정하다가 86년도 11월에 객사를 하셨습니다.

연탄광 에서 두 달을 지내시기 전에 몇 개월 동안 오빠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올케는 일요일마다 어머니께서 교회가실 때 2000원이나 3000원을 주셨다고 합니다. 송파에서 아현동까지 전철을 갈아타고 힘들게 다니시는데 모셔다 드리지는 못할망정 겨우 2000원 3000원을 교회 헌금하시라고 주더랍니다.
75세인 조용한 성품의 순박한 노모에게 올케는 그리 따뜻한 며느리가 아니었습니다. 툭하면 소리 지르고 삿대질을 해대는 며느리의 횡포에 어머니는 늘 고통스러운 나날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살아생전에 작은언니에게 하소연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더랍니다. 다른 할머니들은 아들이 용돈을 10만원 준다고 자랑하면서 서울대 나온 아들가진 어머니는 오죽 용돈도 많이 받고 호강하겠냐면서 오히려 어머니를 부러워하더라고 말씀하시면서 서럽게 울었다더군요.

서울대 나와서 대기업에 입사해 고속승진을하고 떵떵거리며 잘사는 그 자랑스런 아들은 어머니를 길에서 객사하게 만들었고, 생전에 효도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이기주의자였는데 말이지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나 몰라 라 방치하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느라고 청춘을 다 바친 작은누나를 배신하고 작은 누나의 분신 같은 재산인 홍제동집을 마치 자기 것처럼 팔아치우고 착복했으며, 가족을 등지고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운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인데 말이지요.

제가 작년에 심장병 수술을 받기까지 여러 차례 심장병과 갑상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심장병수술을 받았을 때는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오빠는 차라리 제가 죽기를 바랬던 사람처럼 너무나도 냉담했었습니다. 의사는 보호자가 와야 수술을 진행할 수 있다면서 아무리 오빠에게 연락을 해도 들은체 만체 하다가 친척오빠가 화를 내면서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생명이 위독하다는데 얼굴도 내밀지 않냐고 다그치니까 그제서야 와서는 의사에게 "당신이 심장병인지 뭔지 어떻게 아냐"면서 되려 소리를 버럭 지르더라고요.

그러면서 오빠는 자기는 병원비를 대줄 돈이 없으니 병원측에서 수술을 하든지 말든지 하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교회 목사님 및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저는 영세민으로 등록이 되었고 심장재단에서 지원해주셔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사경을 헤메고 있어서 수술을 받은 뒤에 주변분들로부터 들은 얘기였습니다만, 무슨 그런 오빠가 다 있냐면서 다들 혀를 내두르셨습니다 아무튼 저는 심장재단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변두리의 비닐하우스에서 정신지체장애인을 돌보면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지탱하고 살고 있습니다. 수술후 갑상선질환이 재발해서 그야말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오빠는 전혀 도움의 손길을 주지도 않고 있고 제가 당연히 받았어야할 유산의 아주 작은 일부마저 나누어주지도 않고 있습니다.

제가 오빠에게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하소연도 해보았지만, 그동안 오빠는 수술 후 약간의 돈을 적선하듯이 준 것만으로도 자기 할일을 다한 양 큰소리를 쳤습니다. 작은 언니와 큰언니는 오빠 사는 가락2동 극동아파트에가서 1인 시위라도 하라고 할 정도로 오빠와는 의절하고 지내는 상태고요, 저도 이제는 오빠에게 단 한 푼도 요구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제가 너무 마음이 아픈 것은 어떻게 가족인 저를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가고, 그동안 아버지께서 제 나이 16세 때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참으로 슬픔과 배신의 역사였음에 생각이 날 때마다 도리질 치고 싶을 정도로 비참하기만 합니다.

다시금 마음의 평안을 안고 살고 싶은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혹여 그나마 남아있는 생이라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오빠가 잘못을 뉘우치고 당연히 주었어야 할 제 몫의 유산을 돌려주기라도 한다면, 그동안에 있었던 앙금을 모두 잊고 지금 함께하고 있는 장애인분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글을 다 쓰고나니 후련하네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늘 함께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글쓴이// 2006년. 어느 봄날에 정춘자 씀.

자세한내용은메일로보내주세요 : cjcjh5@naver.com


Comments

최명오 2006.06.06 23:33
홍제동 집의 명의는 누구로 돼 있었는지요?
만일 아버님 명의로 돼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상속지분대로 돌려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인간의 탈을 쓴 금수들은 돈을 뺏는 게 가장 큰 복수입니다.
법대로 하세요. 정히 어려우시면 이곳에 님의 메일어드레스를 남기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정춘자 2006.06.07 11:05
자세한거는 이메일로 보내 주세요
cjcjh5@naver.com
김영춘 2006.06.09 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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