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올 해는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고, 6·25전쟁 70주년이자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보훈의 역사는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는 가치와 이를 통해 시민적, 평화적 발전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가치와 의미를 짚어보고자 <프레시안>은 보훈교육연구원과 함께 기획연재를 진행합니다. 이를 통해 보훈의 역사, 사회적 의의, 평화지향성 등을 사회적으로 함께 생각해 보고 방향을 정립해 보는 기회의 장을 갖고자 합니다. 편집자.
정치는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관리하는 과정이다. 기성 제도의 개선과 재발방지 체제의 구축이 객관적인 세계에서는 중요하지만 슬픔의 바다에 빠져있는 유족한테는 그조차도 슬픔을 외면하게 하는 뜬구름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4.3이나 5.18희생자, 세월호참사의 희생자, 전사자의 유가족의 고통과 외침에서 이와 같은 착잡한 정서를 매번 느끼게 된다. 애도, 진혼, 보훈의 방식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차이를 보여준다. 군인의 죽음에 대한 한국의 법제는 경제적 조건의 개선과 책임 관념의 강화에 따라 긍정적으로 변화해왔으며 한국만의 독특한 측면도 간직하고 있다. 어쨌든 국가는 다양한 원인에 의한 희생자와 유족에게 애도와 진혼을 통해 인간다운 세상을 약속해야 한다. 우리는 장차 군인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의 사회문화적 책임의식에 어울리는 새로운 경로를 조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은 군인을 기리는 일은 가장 중요한 애국주의적 소재이다. 훌륭한 인물의 품위 있는 묘역은 백 마디 말이 필요 없는 교육의 공간이다. 군인의 죽음을 보편적 정의와 책임의 관점에서 환기시켜주는 한계 사례는 아마도 ‘자해사망(자해사망이라는 이색적인 용어는 자살이라는 용어가 함축하는 자살자의 자기책임성(국가무책임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보훈법학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자살의 대체 개념이다.필자주)’한 군인의 처우 문제일 것이다. 전사자와 같은 순직자에 대한 처우는 동서고금을 통해 법제상 유사하다. 그러나 군인의 자해사망을 취급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특히 해당국가의 사회보장법제, 연금법제, 국가보상법제, 제대군인지원법제의 상호연관성과 발전정도에 영향을 받는다. 사회보장제도가 허술한 사회에서는 보훈청구권은 유족에게 매우 중요한 생존수단이 되지만, 충실한 사회보장제도를 갖춘 사회에서는 보훈법의 영역과 사회보장법의 영역이 상보적으로 작동한다. 우리의 경우는 전자에 가깝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후자의 제도형태가 바람직해 보인다.
근대보훈법제의 초기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국가는 죽음을 불사하는 행동을 찬양하는 반면, 군인의 자해사망을 종교적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그 유족들에게도 보훈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법문화는 자해사망의 사회학적-병리학적 측면을 통찰하면서 개인적 귀책사유가 아닌 부대환경적 귀책사유로서 자해사망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전사이든 자살이든 군인의 죽음 자체에 대하여 군대와 공동체의 특별한 배려와 책임이 존재한다는 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국가공동체의 수호와 존속을 위한 위험스럽고 힘든 노동과 그 불행한 결과를 합리적으로 분배해야 한다는 정의론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사고까지 널리 등장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군인의 자해사망에 대해 국가 책임이 존재한다는 데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미국은 자해사망에 있어서 직무관련성을 폭넓게 추정하고 자살결행의 심리를 비정상적인 상태로 추정함으로써 개인의 책임을 부정하고 국가책임을 확장한다. 물론 이러한 추정을 깨뜨리는 반증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국가의 책임이 배제된다. 국가의 책임이 배제되는 경우를 대비하여 미국은 군인단체보험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은 국제적으로 많은 전장을 갖는데다가 모병제를 시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관대한 처우를 하지 않는다면 군대를 유지하는 데에 심각한 어려움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과거에 군인의 자해사망을 순직으로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였던 대만과 이스라엘도 오늘날에는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 국가들 간에도 국가책임의 인정 방식 또는 범위에서 여전히 차이가 존재한다. 현재로서 순직자(부대내 과로나 이로 인한 정신적 장애로 자해사망한 군인)와 비순직자(사사로운 이유로 부대 안에서 자해사망한 군인)에게 동일하게 국가책임을 인정하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그러한 동일시정책은 군인의 모든 죽음을 국가가 책임져야할 공동체적 불운으로 간주하는 경우에 실현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방향의 정책도 합당성을 가진다. 그러한 제도적 비전이 실현된 때에는 보훈법제, 연금법제, 보험법제가 하나의 방향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독일은 자해사망이 순직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유족에게 보훈혜택을 당연히 제공하지만 순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경우에도 유족의 생활보장을 위해 제한적인 또는 한시적인 보훈혜택을 제공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한국의 보훈법제는 순직자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각종 보훈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일반사망자(비순직자) 유족의 생활상태를 거의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제도적으로 경직되어 있다. 대만은 자해사망을 전사, 순직, 일반사망으로 구분하고 질병사나 자해사망을 일반사망의 범주에 포함하여 자해사망자의 유족에게 전사자 유족의 보상금의 7할을 제공한다. 대만인들의 실용주의적 접근방식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살인과 같은 중대한 범죄를 범한 연후에 자해사망한 군인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음으로써 제도의 허용치를 설정해 놓았다.
실제로 2012년 우리나라 대법원은 업무와 자해사망 간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는 경우에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이는 종래 본인의 자유의사가 개입한 죽음에 대해서 국가책임을 배제해왔던 판례를 전복한 것이다. 2012년 판결은 자유의사 개입여부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독일의 판결보다 전향적이다. 실제로 현재 독일의 판결은 우리나라 과거의 판결과 논리적 구조가 동일하다. 독일은 그러한 논리 아래서도 현재까지는 한국보다 훨씬 빈번하게 자해사망자를 순직자로 인정해왔지만 만일 한국의 법원이 2012년 대법원 판결에 충실하게 된다면 순직자의 인정비율에서 독일을 압도할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책임의식에서 어떤 공감대를 이룬다면 좋은 제도가 탄생할 수 있다. 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일부 성원의 힘들고 위험하고 전인격적인 노동과 희생을 통해 어떤 이익을 향유한다면 그 사실에서 책임의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사유의 좋은 실례가 사유에 관계없이 의무복무중 사망한 군인에 대하여 국가책임을 인정하자는 제안이다. 민주당 이학영 의원은 이러한 취지의 법안을 20대 국회에 제출하였다. 의무복무군인이 징병제 아래서 원칙적으로 심각한 심리적 부담을 지고 있다는 점, 징병당국이 다양한 심리적-정신적 장애를 징병검사과정에서 사전적으로 발견하고 스크린하지 못한다는 점, 사후에 군복무과정의 군인에 대해 군당국이나 지휘관의 배려감독책임이 존재한다는 점 등에서 자해사망한 의무복무군인에 대한 국가책임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가 의무복무군인에게 한정될 것은 아니다. 초급장교나 단기부사관의 자해사망의 비중도 최근에 현저하게 높아졌다는 사정을 유의해야 한다.
군인의 순직 판정에 있어서 독일, 대만, 미국 등은 단일한 절차를 운용하지만 한국에서는 국방부와 국가보훈처가 독자적인 법에 입각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보훈처를 독립적인 기관으로 출범시키면서 양부처의 권한관계를 명료하게 획정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나는 일시적인 지장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군인의 죽음을 복수의 국가기관들이 상이하게 판정하는 것은 유족에게는 심각한 고통과 번폐를 야기한다. 단일한 법제 안에서 단일한 기관이 순직 여부에 대하여 통일적으로 판단하고 합당한 분류방식에 따라 보훈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국가보훈법제의 통합운영을 재설계해야 하겠지만, 단기적으로 군인보훈법제의 통합운영이 시급하다. 순직이라는 사안에 대하여 여러 가지 법이 동시에 경합적으로 혹은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합리적인지 의문이다. 적용사유를 부자연스럽게 구분하는 법률쪼개기(보훈보상지원법의 제정)로 열등한 권리범주를 창조하는 것은 관련자의 권리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보훈제도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유연성을 해친다.
군인연금법을 직업군인을 위해서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병을 포함해서 모든 군인을 위해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경우 의무복무군인의 기여금은 국가가 대납하면 된다. 독일에서는 군인이 기여금을 납부하는 방식의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의 군인보훈법은 모든 문제를 하나의 법 안에서 해결하고 있다. 현재와 같이 군인연금재정에 대한 국가기여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경우에는 군인연금법을 강화하여 군인의 죽음이나 퇴직, 상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다루는 플랫폼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보훈법제와 연금법제가 영역상 상충하지 않으면서 통합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상이한 시기에, 상이한 발전수준에서, 상이한 정책목표에서 유사한 사태들이 다양하게 규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보훈법제의 합리적 개편의 문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