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5.11 15:46 수정 : 2021.05.11 21:14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전쟁 당시 미국 명령 따라
타국에 재판 권한 없어”
14개 업체 상대 소송 기각
프랑스 법원이 베트남전쟁 고엽제 피해자가 고엽제 제조사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베트남전 당시 독성 화학물질인 고엽제에 노출돼 암, 결핵 등 질병에 걸리거나 기형아를 낳은 피해자는 최소 3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지만 이들에 대한 손해배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24는 파리 남쪽 에브리지방법원이 10일(현지시간) 베트남계 프랑스인 쩐 또 응아(79·사진)가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를 만든 기업 14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고 보도했다. 재판부는 “미국 전시작전 명령에 따라 고엽제를 만든 기업에 대해 프랑스에 재판 권한이 없다”고 밝혔다. 주권국가의 행위는 타국의 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국가면제 원칙에 근거해 이 같은 판결을 내린 것이다. 쩐 또 응아의 변호인 윌리엄 버던은 트위터에 “재판부가 주권면제 원칙을 구식으로 해석했다”며 항소 의사를 전했다.
베트남전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쩐 또 응아는 미군의 고엽제에 노출돼 당뇨병과 암 등 후유증을 앓았고, 딸이 심장질환으로 생후 17개월 만에 사망했다며 2013년 고엽제를 제조·판매한 26개 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독일기업 바이엘에 인수된 몬산토,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다우케미컬 등 14개 회사가 피고로 이름을 올렸다. 이들 대다수는 다국적기업으로 바이엘과 다우케미컬은 프랑스에도 법인을 두고 있다.
미군은 1962년부터 10년간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 약 8000만ℓ를 베트남에 살포했다. 이후 베트남인과 참전용사 최소 300만~480만명이 암 등 심각한 질병과 기형아 출산 등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베트남 숲 전체의 17.8%에 달하는 지역과 2만㎢의 논밭에 고엽제가 살포돼 현지 생태계도 심각하게 파괴됐다.
기업들은 미국 정부가 고엽제 피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번 판결이 나온 이후 생화학물질 제조기업 바이에르는 “베트남전 중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동정한다”면서도 “제조 기업들은 미국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
다른 나라에서도 고엽제 피해자들은 다국적 고엽제 제조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줄줄이 지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09년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자와 가족 500만명이 관련 물질 제조사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한국에서도 고엽제 피해자와 가족 1만6000여명이 한국 법원에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2013년 고엽제와 질병의 인과관계가 증명된 원고 39명에게만 승소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