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살인의 현장’서 울어버린 북파공작원

40년전 ‘살인의 현장’서 울어버린 북파공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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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살인의 현장’서 울어버린 북파공작원

이정호 0 1,966 2012.05.0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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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뉴스

등록 : 2012.05.04 19:20 수정 : 2012.05.06 16:14



1953년 7월 휴전 이래 남한 당국에 의해 북파되었다가 북한 당국에 붙잡히거나 사망·실종된 공작원 수가 무려 7726명에 이른다. 1950년대 말까지 활동한 육군첩보부대 제1교육생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⑨ 북파공작원 사건
남과 북은 공작원들을 그렇게 사지로 내몰았다

작년 노르웨이에서 브레이비크라는 인물이 조그만 섬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총을 마구 쏴 대서 무려 83명을 죽였다.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우선 감옥에 있는 사형수들을 즉시 형 집행하자고 나섰을 테고, 테러를 막기 위해 강한 공권력 행사를 주문했을 것이고, 무슨 무슨 특별법을 만들어 철저히 응징하자 했을 것이다. 물론 신문과 텔레비전은 복수와 증오의 말들로 가득 뒤덮였겠지. 미국이나 중국도 평소 모습으로 보아 우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오슬로 광장은 너무 달랐다. “한 사람의 저렇게 큰 증오보다 우리는 더 큰 사랑을 만들 수 있다.” “복수는 정상적인 반응이지만 노르웨이는 복수하지 않는다.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관용만이 우리의 대응이다.” 성인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말씀이 아닌가.

18살에 북으로 간 전재수는
인민군 총에 성기 절반을 잃고
1년 반만에 구사일생 귀환
그런데 또 소집영장이 날아왔다

평생 술에 빠져 살아온 노인
상관 명령으로 부대원을 죽였고
임신부도 죽여서 묻었다 했다
40년만에 그 현장을 찾았다
뼈가 나오자 노인은 오열했다

미카엘 아버지는 오인사살됐나 처형됐나
얼마 전 인터넷에서 무서운 글을 보았다. ‘보수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전쟁이 나야 한다. 그래야만 그 기회에 좌파들을 다 잡아다가 처단할 수 있다.’ 아, 아직도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현재진행형이구나. 60여년 전 수만명을 잡아다가 재판도 없이 산골짜기며 방공호 구덩이에 묻어버리던 일들이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다. 보도연맹사건 재판을 하고 있는 나는 무서움이 더럭 일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반동’이란 말 한마디에 무수히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래서 남파간첩이고 북파공작원이고 시대가 만들어낸 삶들은 참으로 기구하다.

1995년 무렵 김승훈 신부께서 좀 도와주라며 미카엘이라는 사람을 보냈다. 자신이 어렸을 때, 북파공작원으로 북에 넘어갔다가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호소였다. 나는 천주교 인권위원회 오창래 사무국장과 함께 국군정보사령부와 국방부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이 일을 알아보았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 기록 자체가 없다고 나왔으나 곡절 끝에 간접적인 시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관계자 한 사람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공식적으로 확인해 줄 수는 없지만 미카엘의 아버지는 첫번째 북파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으며 다시 두번째 북에 갔다가 휴전선으로 귀환 도중 인민군으로 오인 사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다.

처음 미카엘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북파공작원은 누구도 내놓고 다룬 적이 없는 금기의 영역이어서 어떻게 이 일을 풀어가야 할지 전혀 가늠이 서질 않았다. 모든 자료는 군이 가지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귀환할 때 서로 식별하기 위한 암호며 비문 등을 공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여서, ‘오인’ 사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계자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얼마 전 과거사위원회 조사관이 쓴 글을 보고 오인 사살이 아니라 일부러 죽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그 글에 따르면 1950년대에 북으로 갔던 한 공작원이 이중간첩으로 남에 다시 내려와서 자수를 했는데 당국이 간첩죄로 재판에 넘겨 사형을 시켰다. 북으로 다시 보내면 또 그곳으로 귀순을 할 테고 그렇다고 남쪽 사회에 돌려보내기에는 마음이 안 놓여 1950년대만 해도 북파공작원은 북에서 무사히 귀환을 해도 남에서 설 땅이 없었다는 거였다.

미카엘 아버지는 그 위험한 일을 하는 대가로 가족들에게 당연히 상당한 보상이 주어질 거라고 어머니에게 일러주었는데 이제껏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일부 보상금이 나오는 단계까지 갔으나 마지막 순간에 유족들의 거부로 일이 틀어졌다. 나는 ‘우선 주는 대로 받으세요. 우리 손에는 아무런 증거도 확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북파공작원으로 순직했다는 사실 자체를 확인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유족들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보상을 두고 왜 저자세여야 하는지 수긍이 가질 않는 모양이었다.

이러는 동안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한겨레21> 김창석 기자에게 북파공작원 이야기를 꺼냈다. 근성있는 기자답게 열심히 파고들었다. 1980년대 중반 내가 군에 있을 때 겪었던 일도 들려주었다. 근무하던 사단 옆에 정보사 훈련소가 있었는데 가끔 퇴근 버스를 타고 나오다 보면 여자들을 태운 버스가 산골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옆자리에 앉은 나이 많은 고참 상사들은 ‘쟤네들 연애하러 가는 거’라고 킬킬대곤 했다. 그게 뭔 말이래유.

가끔 그 부대 소속원들이 형사사건에 연루되어 사단으로 사건이 넘어오곤 했다. 한번은 헌병대에서 출두 요구를 해도 오지를 않자 헌병 대위가 그 부대로 잡으러 간다고 나섰다가 혼쭐이 났다는 무슨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대위가 지프차 타고 부대 근처로 호기롭게 접근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시커먼 인간들 몇이 나타나서 차를 들어 뒤집어엎으려 하더라는 거다.


북파공작원들은 2000년대 이후에야 유령 같은 신세에서 벗어났다. 북파공작원들의 훈련 모습(위). 2005년 1월11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전사자 69기의 합동위패 봉안식.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21> 특종에서 보상법 통과까지
뭐 그 이야기가 꼭 근거가 없지도 않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부대 근처 다방 여자 종업원이 차 배달을 나갔다. 오라는 곳으로 이리저리 찾아가 커피를 따라주고는 그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여자를 차에 태우고 현장을 찾아갔더니 바닷가 후미진 곳에 민간 별장 같은 집이 있었는데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그 이웃에 우리 부대 해안 경비초소들이 있어서 그 집에 대해 물었더니 북파공작원들 훈련하는 곳이라 했다. 도저히 범인들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어 중도에 포기했다.

한겨레 기자들은 내 이야기를 실마리로 열심히 돌아다니더니 도봉산 한 절에 희생된 북파공작원들 위패를 모셔 둔 것까지 찾아냈다. 그리고 1999년 8월에는 <한겨레21>이 북파공작원들 실체에 관해 특종을 했다. 1953년 7월 휴전 이래 남한 당국에 의해 북파되었다가 북한 당국에 붙잡히거나 사망, 실종된 공작원 수가 무려 7726명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1950년대 말까지야 사실상 전쟁 기간의 연장이었다고 쳐도, 1960년 이후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때까지의 문자 그대로 평화 기간에도 2150명, 한 해 평균 160여명이 북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68년 1월, 북의 124군 부대원 31명이 도봉산을 거쳐 청와대 뒷길까지 들어왔고 그해 10월30일에는 15명 1개조, 모두 8개조 120명이 울진·삼척지구로 들어와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런데 북으로 갔다 못 돌아온 이들이 한 해 평균 160명이라.

말이 휴전이지 뒤로는 엄청난 게릴라전이 벌어졌던 셈이다. 남과 북 모두 상대 영토에 공작원을 보낸 사실을 철저히 부인하였으니 휴전협정 위반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 남파, 북파 공작원들은 유령 같은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1972년 남북대화에서 서로 공작원을 보내지 않기로 합의함으로써, 뒤에 숨어서 벌이던 이 끔찍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끝이 났다.

1999년 한겨레 기사 이후 <문화방송> ‘피디(PD)수첩’ 등을 통해서 북파공작원들의 존재는 세상 밖으로 드러났고 해법을 찾기 위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국방부는 계속 이 문제를 묻어두려 했지만 북파공작원 당사자들의 엄청난 항의와, 한겨레 기자 출신 김성호 의원을 중심으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관련 보상법이 통과되었다. 만약 권위주의 정권이 계속되었더라면 북파공작원들은 유령 같은 신세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북파공작원들의 소송을 좀 도와주었다.

전재수는 강원도 양양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와 둘이 살다가 18살 되던 6·25 때 고향에서 명찰도 계급장도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붙들렸다. 아들과 같이 피난길에 나섰던 아버지는 아들이 끌려가는 걸 속절없이 바라보다가 도로 집으로 돌아갔다. 네댓명이 같이 끌려가서 한 이틀 무슨 교육이란 걸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에이치아이디(HID) 대원이 되었다. 적지에 들어가 있으면서, 먹을 양식이며 일체의 보급품들을 스스로 구해야 했다. 한번은 동료 몇과 낙산사 근처 마을에 정탐을 나갔다가 ‘토끼똥 냄새가 나는’, 인민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혹 다른 정보부대원인지도 몰라서 우선은 인민군 행세를 하다가 같이 북조선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을 부르다 딱 보니까 우리 요원이 아니요, 억양이 완전히 틀려요. 그래서 내가 선제 발포를 했지요. 에무 투 30발짜리루 막 긁어대는 거죠.” 그는 5, 6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고환과 성기가 절반이 날아갔다. 1년 반을 사선을 넘나들다 집에 돌아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소집영장이 나왔다. 증명서를 잃어버려 꼼짝없이 다시 군에 갔다. 6·25 때 18살, 19살짜리 피난민들 중에는 군대를 두번 간 이런 경우가 제법 있었다.

북에서도 그들을 ‘무장공비’라 불렀을까
1960년대 후반에는 휴전선 전역에 걸쳐 비무장 지대에서 남과 북 사이에 매복과 기습, 폭파 등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 이 무렵 한 육군중위는 상급부대로부터 차출을 받아 훈련을 거친 뒤 몇 명이 조를 짜서 인민군 복장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가 인민군 막사를 폭파하고 돌아왔다. 보상을 받으려면, 휴전이라는 평시 상황에서 내가 사람을 살상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주장, 입증해야 했으니 참 괴로운 처지가 아닐 수 없었다.

휴전 뒤 서해상에서 적 공작선을 나포하거나 황해도 연안 도서들에 들락거리며 공작을 한 이들로부터는 이런 사연을 들었다. 서해 한 무인도에 있는 부대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 김아무개는 그 뒤 나이 칠십이 되도록 평생을 술에 빠져 살았다. 정도가 아주 심각했는데 그 동료가 그렇게 된 이유가 끔찍했다. 부대원 중에 상관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아무개는 상관의 명령으로 그 사람을 죽여 땅에 묻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상관과 관계가 있는 임신한 여자 하나도 함께. 믿거나 말거나 한 이 이야기는 얼마 뒤 사실로 밝혀졌다. 옆에서 보다 못한 동료들이 40여년 만에 김아무개를 데리고 그 섬에 갔다. 그는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포클레인 기사에게 사람들을 묻은 곳을 지목했고 거기서 사람들 뼈가 나왔다. 젊은 시절 그 무섭던 공작원의 살기는 간데없고 북어포에 사과 몇 알 놓고 김 노인은 한없이 울었다. 지켜보던 옛 동료 노인들도.

전쟁이 끝나고 20년 세월, 남과 북은 군인 아닌 군인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남쪽 뉴스 화면에 비치는 북에서 내려온 ‘무장공비’들의 참혹한 주검은 거의 짐승들의 그것 같았다. 1972년까지 13년간 2150명. 북에 올라갔다가 총에 맞아 죽거나 붙잡혀 죽고 실종된 이들이 그리도 많다니, 북에서도 그들을 ‘무장공비’라고 부르려나. 그들의 주검도 북 주민들 눈에는 죽은 짐승들처럼 보이겠지.

노르웨이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우리는 잔혹행위에 연민과 동정으로, 증오에 통합으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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