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부름받고 목숨 걸어… 베트남전 참전 부끄럽지 않게 해주길” [세상을 보는 창]
세계뉴스룸입력 : 2022-06-29 08:00:00 수정 : 2022-06-28 20:12:27
베트남전 참전용사 신영빈씨
참전명령받고 부모님께 차마 말 못해
우수군인 뽑혀 유학간다고 둘러댔죠
운좋게 3년 사투 끝에 귀국했지만
1964년부터 9년간 32만여명 파병
5099명 사망, 1만여명 부상당해
그뿐인가,
국내 고엽제 피해자만 10만여명
지금 받는 참전수당 월 35만원
삶과 죽음을 오간 젊은 날의 대가
베트남전 두고 수많은 해석 있지만
그러나, 분명한 건 수많은 청춘들
이국땅서 나라 위해 싸웠다는 것
“베트남전은 잊어선 안 되는 우리의 역사다. 머나먼 정글에서 싸웠던 이 모든 분들이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27일 신영빈씨가 전쟁기념관 베트남전 참전용사 전사자 명비 앞에 서서 고인들을 추모하고 있다. 명비에 비친 그의 얼굴이 마치 참전용사를 불러낸 듯 보인다. 하상윤 기자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우리 국민이 겪어야 했던 전쟁의 참화는 두 차례가 있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과 미국의 요청에 의해 참전한 베트남전쟁(월남전)이다. 1930년대와 1950년대를 전후해 태어난 수많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향했다. 그들의 용기와 헌신이 밑거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다. 마땅히 추모하고 존경해야 하는 이유다.
그동안 6·25전쟁과 관련한 행사는 지속돼 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6·25전쟁 72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개최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유공자 위로연도 그중 하나다. 국가보훈처도 이틀 뒤인 26일 한국을 찾은 9개국 참전용사와 가족이 청와대를 관람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천안함 함번(PCC-772)이 새겨진 티셔츠와 ‘우리의 영웅들을 예우한다’(Honoring Our Heroes)는 영어 문구가 적힌 모자를 착용하고 이들을 맞이했다. 모두 6·25 참전 노병을 기린 것이다.
반면 베트남전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돼 왔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는 정부 주도의 변변한 행사 하나 열린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과의 경제 관계가 급속도로 밀접해지고, 외교 관계까지 복원되면서 서로가 지난 일은 어느 정도 덮고 가자는 묵시적 합의에 다다르자 베트남전 파병은 자연스레 묻혔다. 참전용사들도 잊혀져 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노병을 기억하는 건 국가의 품격이고 나라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잊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전쟁의 참혹함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보훈의 달’ 6월이 며칠 남지 않은 지난 27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 노병을 만났다. 먹구름이 드리운 가운데 여름 장맛비가 오락가락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노병은 51년 전 베트남 정글을 떠올렸다.
1948년 6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신영빈씨는 맹호부대(수도사단)원으로 15개월 동안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는 가족들의 환송도 받지 못한 채 1971년 12월27일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당시 신씨처럼 수많은 대한민국 청년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얼떨결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벌어진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그들에게 투철한 애국심, 이데올로기적 사명감, 영웅주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생존만이 과제였다. 전투에 투입된 신씨도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수색과 매복 작전을 수없이 감당했다. 정글을 일렬종대로 이동할 때면 늘 맨 앞에 서는 ‘첨병’ 역할을 맡았다. “언제 저격병의 총탄이 날아와 사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M16 소총으로 내 종아리를 겨누며 자해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베트남 도착 3개월이 지났을 무렵엔 치열하기로 유명했던 ‘안케패스’ 전투에도 참전했다. 우박처럼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화약 냄새와 살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욱한 흙먼지는 시야를 가렸고, 그렇게 전사자들을 밟고 전선을 누볐다.
1964년부터 9년여 동안 베트남전에 파병된 국군은 대략 32만여명(국방부 추산). 이 중 전사자 및 사망자가 5099명, 부상자는 1만여명에 달했다. 신씨는 파병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터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명령을 받고도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차마 월남에 간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질 못했지. 대신 우수 군인으로 뽑혀서 해외에 공부하러 간다고 둘러댔어. 나중에 부모님이 아시고는 노발대발했지.” 그렇게 이등병이던 신씨는 병장 계급장을 달고는 1973년 2월 무사히 귀국했다. 신씨처럼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부대에서 강제로 차출됐다. 수많은 청년이 국가에 의해 등 떠밀려 다른 나라의 전장에 투입된 셈이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그는 참전명예수당으로 월 35만원을 받는다.
신씨는 “6·25전쟁 참전용사들처럼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세상이 변하면서 월남전과 관련한 파병은 언급해서는 안 될 것처럼 금기시된 게 사실 아니냐. 언론은 전쟁의 참상을 거론하며 참전군인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지기보다 현지 민간인 학살을 더 부각시켰잖느냐. 참전 기념행사는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노병에게 참전명예수당과 유공자 명패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전 일이다. 그래도 대한민국 어딘가에 기념비나 조형물 하나 정도는 세워 줘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좋든 싫든 우리가 간직해야 할 역사인데 말이다.”
현재 국내에는 10만여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존재한다. 국가는 이들에게 일정액을 보상하고 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정확하게 증상을 규명할 수 없어 고엽제 피해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노병들이 적지 않다. 신씨는 “고엽제 피해자 진단을 위한 기준 자체가 너무 엄격하지 않나, 정부가 고민해야 한다. 고엽제 등으로 고통받는 분들을 위해 보다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나 역시 귀국 이후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지만 고엽제 판정을 받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뚜렷한 병명을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
아직도 불분명한 베트남전 참전 관련 상황들에 대해 국가의 정리와 판단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했다. 신씨는 “상병 때 매달 120달러 정도를 전투수당으로 받았는데, 40달러만 지급되고 나머지 80달러는 정부가 가져간다는 소리가 장병들 사이에 파다했다. 실제 그러한 행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소가 건설되는 등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을 닦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 않으냐.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나 진상조사를 통해 만약 그런 내용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참전용사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지난해 5월 설훈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12명은 ‘월남 참전 전투수당 지급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지난 1월 국방위 전체회의에서는 관련 법률공청회도 개최해 전투수당 지급의 필요성과 보훈정책 방향 등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 당시 국방위원 대부분이 베트남전 참전용사 전투수당 지급, 보훈 확대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렇지만 아직 달라진 것은 없다. 베트남전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신념에 따라 여러 해석을 낳는다. 전쟁이 정치의 부산물인 만큼 이런 해석은 정치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지만 국가의 명령에 따라 머나먼 이국땅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 임무를 수행한 노병의 헌신은 기억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베트남전 노병들의 평균 나이가 70대 후반이다. 정부가 법적인 조치를 통해 밑그림을 그려야 할 때다. 그래도 될 만큼 나라가 살 만해지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