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수 성적과 의사 될 자격
이진희 기자 입력 2024.09.20 16:00
“의대 입시서 의사 적합성 선별 뒷전”
성적 외 부분도 중점 두는 선진 국가들
필수의료 부활 위해선 입시도 변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정지태 전 대한의학회장의 지난해 3월 인터뷰엔 이런 대목이 있다. “의사는 똑똑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의사는 오랫동안 앉아서 답답하게 일해야 한다. 때문에 성실하고 윤리적인 사람이 해야 한다. 똑똑한 사람이 의사 하면 자꾸 다른 곳으로 간다. 의대 입시에서 면접을 통해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기능이 사라졌다. 의대 지원자를 대상으로 심층 면접을 해보면 의사 되기에 적합한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회적 신뢰의 저하, 공정성 때문에 면접이 당락을 결정할 수 없게 되었다. 아쉽다. 예전에는 면접에서 의사가 되면 안 될 사람을 걸러냈다. 의대생을 뽑을 수 있는 권한을 의대 교수에게 줘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직업윤리가 결여된) 똑똑하기만 한 사람이 의사가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들어진 의대생이 아무리 수능 성적이 좋아도 고수익만을 추구하며 미용의사가 된다면, 의대 설립 목적을 볼 때 그 의사의 사회적 가치는 마이너스에 가깝다. 차라리 외딴 마을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옆집 아영이나 민준이가 탁월하진 않아도 성실한 의사가 되어, 주민들을 위한 동네의원을 연다면 그게 바로 더 이상향에 가까운 의료체계가 아니겠나.
한국이 망국적인 필수의료진 부족에 시달리는 이유는 27년간 늘리지 못한 의대 정원, 필수의료 지원 부족의 이유가 크지만, 필수의료에 진출할 계획이 없는 성적만 좋은 수험생들을 가려내지 못하는 의대 입시도 한몫했다. “캐나다에서도 피부미용 분야 의사가 돈을 더 잘 벌기는 하지만 이 때문에 필수의료 분야가 인력난을 겪지는 않는다. 만약 의대 졸업생 대다수가 소득을 위해 비필수의료 분야를 택한다면 그건 의대 입학생 선별의 실패다”(캐나다 앨버타주 캘거리 권역 급성기 분야 책임자 스콧 뱅크스의 인터뷰)라는 지적은 뼈 아프다. 캐나다 의대 입시는 의사가 되려는 이유와 봉사활동 경력 등을 평가한다고 한다. 또 독일에선 의대생의 20%를 응급구조대원·간호사·조산사 등 의료·보건 경력자 중심으로 7년 이내에서 오래 기다린 순으로 입학시키는 제도가 있다. 관련 분야의 풍부한 경력과 성실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2022학년도 기준, 의대 입시 전형 중 인성면접 없이 성적만으로 모집한 경우는 57.5%에 이르렀고, 최소한의 결격 판단용 면접(10분 내외)만 보는 경우도 29.1%라는 분석이 있었다. 의대생의 86.6%가 제대로 된 인성검증 없이 성적 요소만으로 선택됐다. 또한 대학별 전체 모집인원의 10% 이상을 사회통합전형(기회균형선발 제도)을 통해 국가보훈대상자·장애인·기초생활수급자 등으로 선발토록 하고 있는데, 의대는 이 비율이 3.2%(2024학년도)에 불과했다.
의정 갈등 와중에 일부 의사들이 ‘썩은 우물’ 같은 내면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걸 목도한다. 의사·의대생 커뮤니티에 “개XX들 매일 천 명씩 죽어 나갔으면 좋겠네”, “드러누울수록 의사 가치는 올라간다”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그럼에도 국민 곁엔 어떤 상황에서도 응급실과 병원을 지키는 많은 의사들이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이분들 덕에 큰 피해 없이 추석 연휴를 버텨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엔 ①의대 증원 저지를 위해 환자들이 더 죽어야 한다는 의사 ②애초 미용만을 진로로 삼은 의사 ③어렵지만 필수의료를 선택하는 의사들이 있다. 국·영·수 성적으론 이들을 가려낼 수 없음을 누구나 안다. ①이 자주 존재를 드러내는 요즘, “악마를 보았다”고 분개하고 말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인성을 의대 입시에서 걸러내지 못하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