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고립된 국가유공자의 쓸쓸한 죽음… 무연고 사망자 4년 사이 2배 늘어 [심층기획-고립된 국가유공자들]
세계뉴스룸입력 : 2023-04-10 06:00:00 수정 : 2023-04-10 11:26:28
무연고 사망 유공자 4년 사이 2배 증가
1월에는 독립유공자도 사망, 9명 남아
1인가구 저소득 보훈대상자 2만2875명
“유공자 정책 간 연계성·홍보도 부족해
신청주의 탈피-수요자 적극 발굴해야
“아마도 잊힌 사람이 된 게 아닌가 싶어….”
지난 5일 서울 노원구의 한 임대아파트. 베트남전 참전 국가유공자 김봉현(가명·75)씨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에게 집은 단절의 공간이다. 17년 전 아내와 사별한 후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가 붙은 현관문을 두드린 사람은 드물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일을 돌봐주는 재가보훈실무관(옛 보훈섬김이)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방문했지만, 지난해부터 전화 통화로 대체됐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화장실 수도가 고장났지만 고칠 방법도, 도와줄 사람도 생각나지 않아 몇 주 동안 물이 새는 채로 지냈다.
김씨는 최근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일주일에 두 번, 3시간짜리 환경미화 노동을 한다. 일당은 3만원이 채 되지 않지만 바깥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시간이다. 일용직이 아닌 정기적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는 그의 침대 곁에는 노인 일자리에 관한 책들이 놓여 있었다. 베트남에서 다친 다리로 지금도 거동이 불편하지만 전장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만큼 괴롭지는 않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휴가를 갔다 온 사이 부대원들이 많이 전사했다”며 “집에 혼자 있으면 내게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던 죽은 전우들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국가유공자. 나라가 위기일 때, 혹은 나라가 있기 전부터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다. 국가유공자법 1조는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을 합당하게 예우하고 지원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도모하고 국민의 애국정신을 기르는 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우리 사회가 품어주지 못해 고립되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6월 국가보훈처의 보훈부 승격을 앞두고 무연고 국가유공자의 실태 그리고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한 방안들을 짚어봤다.
◆무연고 사망 유공자 4년 새 2배 늘어
사회에서 고립된 채 홀로 맞이하는 쓸쓸한 죽음. 이런 죽음을 ‘고독사’,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는 경우 ‘무연고사’라고 부른다. 고령화, 가족 해체 등으로 생긴 사회적 문제인데 국가유공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국가유공자 중 무연고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 9일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실이 보훈처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에는 무연고 사망자 수가 17명이었지만 2022년 32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최근 5년간 108명의 유공자가 홀로 고립된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사망자가 국가유공자인지 확인하지 않아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고 문서실 혹은 창고 형태의 무연고실에 보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 추모조차 받지 못하는 공간에 방치돼 온 것이다. 이에 국민권익위원회는 지자체가 국가유공자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보훈처의 정보공유 시스템을 개선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현재 국가유공자들의 평균 연령은 71세로 점점 고령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1인가구로 지내는 이도 많다. 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저소득 보훈 대상자 중 주민등록상 1인가구는 지난해 10월 기준 2만2875명이다. 이들은 1인가구일 뿐 아니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혹은 차상위계층으로 생활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사회적 취약계층이다. 고령인 데다 건강 상태도 좋지 않지만 가족이 없거나 떨어져 지내는 등 돌봐줄 사람이 없어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유공자들의 사회적 고립, 특히 무연고사를 막기 위해 홀로 거주하는 유공자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올해 2월 기준으로 9명 남은 독립유공자들의 경우 평균 연령이 98세로 가장 고령이다. 지난해 1월에도 독립유공자 1명이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김삼열 독립유공자회 회장은 “남은 애국지사분들 중 가족과 함께 사시는 분도 계시지만, 요양원에 들어가 계신 분도 있고 연세가 많으셔서 교류 없이 지내시는 분도 계신다”며 “이번에 돌아가신 분도 그렇고 대부분 혼자 가난하게 살아오신 분들이 너무 많았고,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유공자 분들을 제대로 예우해야 한다”며 “국가유공자의 노후를 보장하는 데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정 방문 사각지대… 차별성도 부족
보훈처는 취약계층인 국가유공자에게 방문요양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독거 세대 등 도움이 필요한 보훈 대상자의 경우 재가보훈실무관이 집을 방문해 가사 지원, 건강 관리를 도우며 모니터링하는 차원으로 현재 재가보훈실무관 한 명당 10여명을 맡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유행으로 한동안 가정 방문이 중단됐다. 애초 해당 제도 자체를 모르는 유공자도 많다. 고엽제후유의증을 앓는 월남전 참전 용사 A(78)씨는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한 재가보훈복지서비스 대상이지만, 그런 내용 자체를 몰라 이제껏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보훈재가복지서비스만의 차별성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2021년 국회입법조사처가 작성한 ‘보훈재가복지서비스 현황과 향후 개선과제’에 따르면 현행 서비스는 보건복지부의 저소득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복지서비스와 동일한 맥락에서 제공되고 있다. 보고서는 보훈 대상자가 예우 정도를 실감할 정도로 차별화한 서비스가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월남전참전유공자회 관계자도 “참전 유공자들의 경우 혼자 지내거나 고립돼 있으면 전쟁의 기억들로 인해 괴로워하기도 한다”며 “실무관들이 방문해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뿐 아니라 대화 상대가 되어주고 우울증에 빠지지 않게 도와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복지 ‘신청주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정부가 유공자를 위해 내놓는 정책 수는 증가하고 있지만 정책 간 연계성이 부족하거나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해당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정부는 최근에도 유공자들이 고유가 등으로 폭등한 난방비를 떠안는 것을 막고자 가스 감면 혜택 등을 발표했지만, 대상자의 80% 이상은 신청 방법 혹은 제도 자체를 몰라 혜택을 받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들은 유공자에 대한 복지정책의 경우 신청주의에서 벗어나 수요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복지학)는 “복지 제도들이 급여도 있고 보건 혜택도 있고 수급 지원 제도 프로그램 또한 다양하고 계속 바뀌고 있다 보니 보훈 대상자뿐 아니라 담당 공무원들도 잘 모른다”며 “보훈부로 승격되면 행정 일원화라든가 제도 간소화를 통해 효과성을 높이는 행정지원 체계를 이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훈처는 무연고 사망 국가유공자가 늘고 있다는 지적에 취약계층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보훈처 관계자는 “현재 매년 상·하반기에 복지부, 행정안전부 등 관계 부처 협조를 통해 취약계층을 파악하고 있다”며 “재가복지서비스뿐 아니라 인공지능(AI) 케어콜 서비스 등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보훈 대상자들의) 정서 및 안전 관리를 지원하는 시범사업을 하고 있으며, 추후 그 결과를 토대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가복지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유공자에 대해서도 “본인 신청 외에 지방 보훈관서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발굴해 나가고 있다”며 “(홍보 등을 강화해) 향후 독거 세대 국가유공자가 제도를 몰라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