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0월 어느 날 밤 명령이다. 서둘러 곤뽕이라 불리는 큰 가방을 쌌다. 해병대 1년 차인 나는 대원들과 일명 '십발이'라는 큰 차에 올랐다. 포항역에 도착 후 열차로 갈아탔다. 출입문마다 헌병이 보였다. 사병들이 수군거렸다. 누군가 볼펜과 종이를 찾으며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른 사람들도 따라 했다. 날이 밝으면서 밖을 보니 부산이다. 큰길가에는 이별을 암시하는 현수막이 몇 개 걸려 있다. '아, 우리가 월남 전쟁터로 가는구나.' 짐작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보이자 사병들이 너도나도 종이를 던졌다. 거기엔 부모님 이름과 주소, 월남에 가게 되었다는 긴박한 글이 담겨 있다. 내가 던진 종이를 어떤 사람이 쳐다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음이 놓였다.
부산항 3부두에 도착했다. 여군들이 나눠주는 빵을 입에 물고 걸어가면 다른 여군이 보리차 한 잔을 주었다. 앞사람이 가는 대로 가다 보니 웅장한 배 위에 올랐다. 아래에선 환송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했다. 스물두 살, 5대 독자인 아버지의 7남 4녀 중 둘째 아들이다. 월남으로 가는 배 안에서 지독한 멀미가 줄어들 즈음 '캄란만'에 도착했다.
진지구축과 훈련으로 이어지던 어느 날, 저녁 특식으로 맥주와 고기가 풍족하게 나왔다. 내일이 작전 나가는 날이다. 대원들은 다소 비장하고 조금 들떠 있었다. 이튿날 분대장과 통신병, 첨병 등 몇 사람이 조를 이루어 베트콩이 있는 동굴로 진입을 시도했다. 나는 동굴 맞은편에 기관총을 장전하고 여차하면 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쏘기도 전에 '꽝!' 소리와 함께 센 열기가 몰려왔다. 곧바로 "소대장님! 소대장님!" 애타게 부르는 분대장 목소리가 들렸다. 동굴 앞으로 다가서니 뿌연 연기 속에 두 다리와 몸통이 분리된 사람이 보였다. 부비트랩이라는 덫을 밟은 것이다.
미군 헬리콥터가 내려와 다리 없는 분대장을 싣고 병원으로 날아갔다. 뒤따라온 특수부대가 땅굴을 폭파하면서 작전은 끝났다. 우리는 주인 잃은 두 다리를 하나씩 어깨에 메고 걸었다. 단단한 땅을 찾아 정성껏 묻었다. "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정신 가슴에 안고….' 있는 힘을 다해 군가를 불렀으나 울음 섞인, 마치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부대로 돌아왔다. 우리는 또다시 특식을 맞이했다. 살아 돌아온 전우들을 서로 끌어안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고 밤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 부대에는 몇 차례 특식이 더 나왔다.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가는 동료도 한 명, 두 명 더 생겼다. 그때마다 살아남은 동료들과 술 마시고 어깨동무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배부르도록 많은 술을 마셨지만, 마실수록 정신이 또렷했다.
15개월 후 나는 귀국했다. 그 후에도 월남전쟁은 몇 년 동안 지속되었고 더 많은 한국 군인이 파병되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이 생겼다. 나라의 발전이 월남파병과 관계있다는 것을 먼 훗날 알게 되었다. 뿌듯하면서도 씁쓸했다. 나라에서 우리들 돈을 일부 떼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애써 외면했다.
전투지역이던 다낭, 캄란, 나트랑은 관광지가 되었다. 월남(지금의 베트남)에서 무엇을 위해 싸운 걸까. 아직도 총소리에 잠이 깨고, 전우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지금은 참전수당이라도 올려달라고 정부에 사정하는 신세가 되었다. 가끔 보훈병원에 다니고 옛 동료들을 만나 실없는 농담으로 서로 위로한다. 깃털처럼 가볍게 하루를 보낸다.
여기까지 어느 해병대의 한바탕 꿈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노병(老兵)은 담배 하나 꺼내 들고 문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희뿌연 연기 속에 가물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필자는 스물두 살의 앳된 군인을 상상한다. 역사적 사실 속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기록노트를 가방에 넣으며 심한 갈증이 밀려왔다.
맹호 기갑연대 안케패스에 다녀왔지요.
바로 윗 형이 작가님과 비슷한 시기에 투이호아 청룡부대에 다녀왔습니다.
기억들이 새록 새록해 집니다.
자주 글 올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