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6년 11월 육군에 입대한 A씨는 입대 1년만에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다. 원인은 선임병의 구타. 선임병이 주최한 내무반 회식에서 춤을 추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총으로 머리를 맞은 것이다. 이후 A씨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이상 행동과 언행을 보여 결국 1978년 2월 의병 전역했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2006년 A씨는 국가보훈처에 군대에서의 부상을 주장하며 국가유공자 신청을 냈다. A씨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하는 군대. 그러나 군대에서의 폭력, 폭언 등 가혹행위는 종종 보고되고 있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겪기도 하고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A씨는 보훈처로부터 "군대에서의 폭행과 A씨의 질병의 인과관계가 없다"며 국가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A씨는 대구지방보훈청장을 상대로 국가유공자등록불인정처분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A씨가 제기한 소송은 대법원까지 오가는 법정공방 끝에 2009년 10월 대구고법에서 확정됐다. 법원은 "오랫동안 A씨를 진료한 병원은 A씨와 가족의 증언을 기초로 군대에서의 폭행을 발병경위로 기재했다"며 "A씨의 신체 감정결과 뇌손상 부위가 폭행을 당한 쪽에 위치, 이상 증세를 보일만한 다른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군대 내 폭행사건의 피해자는 폭행을 한 당사자는 물론 국가를 상대로도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국가는 군대를 관리감독 할 의무를 지기 때문에 연대책임을 져야한다는 게 판례의 태도다.
#수원지법은 지난해 B씨가 "육군에서 선임병에게 상습적으로 구타 및 추행을 당했다"며 해당 선임병 C씨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C씨와 국가는 연대해서 29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B씨는 강원 소재 육군 부대에서 폭행을 당하거나 참기름을 마시도록 강요당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겪었다. 재판부는 "C씨는 불법행위를 저질렀고 국가는 그에 대한 관리감독 의무를 소홀했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군대에서의 가혹행위로 인한 자살사건에서도 법원은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일부 인정한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폭행과 추행 외에도 군대에서 겪은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사건에서도 국가의 감독책임이 인정되는 추세다. 하지만 자살은 당사자의 책임이 큰 만큼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는 게 일반적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최근 군부대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진 D씨와 E씨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유족들에게 6000여만원씩 지급해야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군 특성상 국가는 장병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보존, 사회에 복귀하게 할 의무가 있다"며 "국가는 D씨와 E씨가 우울증 가혹행위 등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에도 이에 대한 관리감독을 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법원은 두 사건에서 국가의 책임 비율을 20%로 제한했다. 숨진 장병 한명을 상대로 한 가혹행위 등 불법이 없는 이상 자살은 본인의 책임이 80%에 달한다고 본 것이다.
한 법률 전문가는 "폐쇄적인 군의 특성상 군내 안에서 일어난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가혹행위에 대한 군 자체 조사나 동료병사의 증언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한편 법원은 1968년 북한과의 무력충돌에 대비해 창설된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일명 실미도 부대)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다른 판결을 내 눈길을 끈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해 4월 F씨 등 실미도 부대원 유족 2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2억6000만원을 배상토록 한 원심을 확정했다. 국가가 장교임용 취업보장을 내세워 부대원들을 모집한 점 등 불법행위가 있었으므로 그에 따른 정신적 손해배상을 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 1월 G씨 등 다른 실미도 부대원 2명의 유족 13명이 낸 판결에서 원고 패소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들은 앞선 소송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4억여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법원은 "실미도 부대에 대한 진상보고서는 2006년 7월 나왔다"며 "이들은 국가의 보상금까지 받아 손해배상 소멸시효인 3년을 지나 제기한 손해배상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