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 야욕이 팽창하여 1910년 인접국인 한국을 합방하더니, 1931년 3월엔 중국의 동북지역을 떼어서 만주라는 일본의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그 여세로 5월 중국 광동에 왕조명(汪兆銘)에 의한 친일 국민정부를 세운다.
7월엔 만주에 진출한 한국인 농민을 선동해서 만주 농민과 충돌시켜 교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출동하여, “만주사변”이 발발한다.
1937년 7월 7일엔 북경에 있는 노구교(蘆構橋)에서 중-일군대가 무력충돌을 하더니 만주사변이“지나사변”으로 발전한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며 일본은 국가 총동원령을 선포한다.
사회는 전시체제로 바뀌며 국민들은 궁핍생활을 강요당한다. 일본 군인이 말 타고 칼을 휘두르며 중국군이 방어하는 진지로 돌진하면 중국군의 방어진지는 힘없이 무너져서, 일본군에선 기병(騎兵) 병과가 중요병과요,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라는 군가가 작사 작곡되어 대중이 즐겨 부르고, 군대의 병과도 기병 병과는 군대와 사회에서 인기가 대단하다.
나라에 따라서 국경일도 다르지만 일본정부는 전쟁을 하느라 기병의 바탕이 되는 말을 공급하기 위해 4월 7일을 말을 사랑하자는 애마일(愛馬日)로 정하고, 초등학교 학생들은 오전에 깃발을 흔들고 시내를 행진하며 애마진군가를 부르는 깃발행진 날이다.
“군도를 높이 들고 적진으로 돌진하면 힘없이 무너지는 적의 방어진, 애마여 울어라 승리로구나(從には通らぬ此の劒,眞っ先き驅けて突っ込めば,何んともろいぞ敵の陣,馬よいななけ鬪きだ)”하는 애마진군가는 학생들이 즐겨 부르는 군가다.
만주사변과 지나사변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1년 한국에 농산물 공출제(供出制)를 시행하여 생산되는 농산물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한국에선 양곡 배급제를 실시하니, 살기는 어렵고 사회는 암흑으로 변하며 동물적인 생활을 강요당하고, 일본 정부는 본격적인 식민지 정책과 우민 정책을 쓴다.
지금은 대학교를 나와도 취업이 어렵다고 하는 세상인 데, 60년 전에는 일본이 전쟁을 하느라 젊은이는 징병으로, 징용으로 모두 끌어가서 인적자원이 부족한데다, 일본 정부는 학식 있는 한국 사람을 싫어해서 우민정책을 실시하니, 세상엔 어린 초등학교 학생과 무식한 노인들뿐이어서 취업에 대한 근심은 없으며, 초등학교 때 진로를 잘 잡으면 평생을 순탄하게 지낸다.
상호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공부도 잘하고 품행도 단정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어린 학생이라고 기대를 걸었는데, 졸업 때까지 2년을 못 참고 싸움에 열중하여 불량자로 불리며, 학비가 안 들고 장차 초등학교 선생이 보장되는 사범학교 입학도 거절당한다.
1942년 봄의 깃발행진 날을 맞아 등교한 어린 학생들은 수업이 없으니 홀가분한 기분으로 조회 전 짧은 시간을 잡담으로 보내는 데, “땡, 땡, 땡...,” 하고 조회 집합 종소리가 들린다. 학생들은 “우루루”줄지어 밖으로 나가는 데, 누군가가 상호 등 뒤에서 “이 자식 빨리 나가”하는 욕설과 함께 상호에게 발길질을 한다. 상호가 뒤돌아보니 반에서 힘세기로 소문 난 황한복 군이다. 황군이 발길질을 한 데는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것은 1939년 여름 상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춘천에 기차가 들어오고, 사범학교가 생기며 읍세(邑勢)가 팽창할 때다. 사범학교가 생겼으니 부속 초등학교 학생이 있어야 하는 데, 춘천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가운데 주소지가 사범학교 근처에 있는 학생을 골라 필요한 수만큼 이적(移籍)을 시키고, 사범부속초등학교로 학생을 나눠준 춘천초등학교에선 남은 학생으로 학급을 재편성 한다.
상호네 학년에선 1조부터 6조 까지 있던 학급을 줄이면서, 3조의 여자 학급을 상호가 소속한 2조의 남자 학급으로 합치고, 5조와 6조의 남자 학급을 한 학급으로 합쳐서 5,6조로 부른다.
2조의 학급 담임이던 홍(洪晩均) 선생은 남학생과 여학생을 한 자리에 앉히고자 학생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반장인 상호 의견을 묻는다.
담임선생의 질문을 받은 상호는, “학생들 의견을 물을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좋다고 생각하시면 뜻대로 하시오”라고 대답하자, 담임선생은 “학생을 대표하는 반장 의견이 합석에 찬성 한다”라고 하며 남녀 학생이 한 책상을 쓰게 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합석에 대범했으나, 힘 센 남학생은 같이 앉아야 할 여학생이 공부를 잘하면 자신의 위신이 손상되고 기가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날 이후 힘 센 학생들은 상호만 보면 말보다 먼저 주먹이 나르며 발길질을 하고, 힘 약한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상호를 피해 상호는 반에서 기피 인물로 인식되어 모두에게 “왕따”를 당한다.
상호는 공부에 흥미를 잃고 힘 센 학생의 주먹이 두려워 학교 가기가 싫어진다.
지금 같으면 사회 문제로 비화되고, 신문에 날 사건이지만 60년 전에는 학생끼리의 사소한 문제로 찻잔 속의 잔잔한 태풍이다. 힘 센 학생으로부터 매일같이 맞고는 울고 있기 때문에, “울보”라는 별명이 상호 이름을 대신한다.
교실에서 황군으로부터 발로 채이고, 운동장에 나가서 울고 있는 데, 상호와 친하게 지내던 이해근 군이 다가와서, “너 정말 아파서 우니”하고 묻는다. 상호가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저었더니, 이군은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군은 힘은 약했으나 싸우면 상대방의 멱살을 잡고 돌이나 쇠붙이로 부서를 가리지 않고 때리며 끝까지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별명이 “찰거머리”로 불리며 그와는 누구도 싸우려 하지 않는다.
이군은 황군을 찾아가서 “상호가 너 보고 걸리라고 하더라”라고 하지 않은 말을 전하니, 그 말을 들은 황군은 “울보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라고 중얼거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상호 곁으로 달려와서 말없이 상호 멱살을 잡는다.
“걸리라”는 말은 60년 전 어린이 사회에서 덤비라는 뜻으로 유행된 도전적인 언사다.
황군이 상호 멱살을 잡고 앞뒤로 흔드는 데, 급우들은 황군과 상호를 에워싸고, “해라, 해,(やれ,やれ)”하고 싸움을 선동한다. 도망도 못 가고 진퇴양난에 빠진 상호는 황군의 멱살을 잡고 발을 걸어 땅바닥으로 넘어트린다.
황군의 힘이 무서워 상호는 최후의 발악을 했는데 뜻밖에도 황군이 넘어진다. 상호는 황군을 타고 앉아 주먹세례를 안기며 황군을 제압하자, 그날부터 상호는 “싸움쟁이”라는 별명을 새로 얻고, 완력을 자랑하던 어린 학생들은 상호의 등장으로 기존의 서열은 파괴되고, 새로이 힘의 서열을 조정하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누구나 아버지가 있으면 삶의 물결이 바르게 흐르도록 인도하는 데, 상호는 아버지가 없으니 공부보다는 싸움에 열중한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1941년까지 상호 행동이 공부를 위주로 하는 실내 활동이었다면, 1942년 이후론 싸움을 위주로 하는 옥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매일같이 급우로부터 이유도 없고 유감도 없는 싸움의 도전을 받고, 싸운 결과에 따라 힘의 서열을 재조정하게 되니, 상호는 한 자리라도 힘의 서열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싸움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나라오는 상대방의 주먹을 막고, 자신의 발이 먼저 상대방의 사타구니를 차나 하고 연구를 거듭하며 졸업 때까지 2년간을 급우와 싸우는 데 시간을 보내고, 싸울 상대가 없으면 이웃 마을까지 원정을 간다.
강 건너 우두리(牛頭里) 마을에서 소양강 다리를 건너 읍내로 가려던 남자 어린이는, 읍내로 가는 다리 길목에서 상호가 버티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강 하류를 흐르는 여울을 건너 읍내로 들어간다.
60년이 지난 지금 상호와 싸웠던 황군은 군대도 안 가고 강원도 교육감으로 정년퇴직을 하여 낚시를 취미로 여생을 보내는 데, 상호는 군대에 소집되어 6.25사변을 치르고, 월남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에도 못 가고 객지를 떠돌며 집 앞 공원에서 상이군인이란 말을 들으며 소일을 한다. 어렸을 때 발길을 잘못 디딘 것이 인생길을 크게 변화시킨다.
생계를 책임지던 상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상호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맡아야 하는 데, 남겨놓은 유산도 없고 여자로서 특별한 기술도 없으니,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노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소양강 건너 우두리(牛頭里)에 위치한 농업시험장 묘포(苗圃)에 가서 낙엽송 묘포에서 김을 매어 하루 60전의 노임을 받지만, 60전의 노임으론 4식구의 생계를 해결하지 못한다.
상호는 졸업을 앞두고 등록금이 필요 없고 초등학교 선생 자리가 보장되는 사범학교 응시를 희망했으나 담임선생으로부터 응시를 거부당하고(일본 식민지 하에선 초등학교 선생이 보장되는 사범학교 응시는 학교장의 추천이 필요하다), 등록금이 필요한 중학교와 농업학교는 돈이 없어 응시를 포기한다. 급우들은 사범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고 새로 맞춰 입은 교복 아랫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거리를 활보하는 데, 상호에겐 모자 위에 달린 사(師) 자 모표가 크게 보인다.
외아들의 사범하교 진학도 좌절되고 가계(家計)도 어려운 환경에서, 생각다 못한 상호 어머닌 등록금이 필요 없이 공부를 가르친다는 공장의 홍보에 따라, 아들은 공장 기술자 양성소로 보내고, 자신은 1944년 여름 친척을 의지해서 고향(충남 예산)으로 내려온다.
상호가 사범학교 응시를 거부당하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공장기술자양성소는, 기술을 배우며 격일제지만 공부를 할 수 있어, 중학교로 진학하는 것보다는 기술자 양성공이 좋다는 공장당국의 선전에 따라, 상호는 공장 기술자양성소(日立製作所仁川工場技能者養成所)로 떠나며(1944.4.1) 고향(春川)을 등진다.
전체 학생이 150명으로 방이 30개 있는 기숙사에 학생을 합숙시키고, 한 방에 5명씩 수용하여 학칙(學則)을 적용받는 기숙사 생활을 시킨다. 기술자 양성소를 나온 사람은 2년간 이론을 배웠다고 해서 종업원의 작업 현장에서 공원(工員)을 대표하는 반장 자리를 준다. 신분은 공부를 하는 학생으로 1학년이 100명, 2학년이 50명인데, 각 학년마다 학생을 주물공장과 내화벽돌공장, 특수화확공장으로 나눠서 하루는 교실에서 이론을 배우고, 하루는 공장에 나가서 이론을 실천한다.
'히타치'공장은 주물공장과 내화(耐火) 벽돌공장, 화학 약품인 붕사(硼砂)를 생산하는 특수 화학공장(현 동양화학)으로 구성돼 있다. 주물 공장은 쇳물을 녹여 기관차의 부속품을 만들고, 내화 벽돌공장은 주물공장에서 용광로 벽을 쌓는 내화벽돌을 생산한다.
특수 화학공장은 전전(戰前)엔 남미(南美)의 '칠레'에서 수입하던 자연산 붕사가 전쟁으로 수입길이 막히자, 붕사의 화학 기호(na2b4h710h20)가 들어 있는 광석을 분리 융합해서, 붕사를 생산한다.
공장 종업원은 공원이라 부르며, 기술을 배우는 학생은 양성공이라 부른다. 급료는 공원이 한 달에 72원, 양성공은 숙식을 제공 받고 5원 20전이다.
상호는 공장 기술자 양성공으로 산업전사(産業戰士)라고 해서 사회에선 중학생보다 우대하고 있으며, 세상에선 초등학교를 나온 지식인도 징용으로 일본 구주(九州)의 철공장과 북해도의 탄광으로 끌려가는데, 상호는 인천의 군수공장에 현지 징용이란 명목으로 취직이 된 것 만을 다행으로 알고 임금의 다과는 문제시 하지 않는다.
공장 당국에선 3개 공장의 생산 실적과 종업원의 동태를 매 월말에 정기적으로 인천 헌병대와 경찰서에 보고하고, 그들의 감시와 지시를 받는다.
1945년 1월, 일본 당국은 인천에 군수공장이 밀집돼 있다는 생각으로 주요 공장을 평양으로 소개(疏開)한다.
상호가 소속돼 있는 특수화학공장도 평양의 선교리로 이전을 하는데, 공장을 따라 평양으로 가는 종업원을 제외한 잔여 종업원은 주물공장과 내화공장으로 재배치한다.
상호가 특수화학 공장에서 분석공(分析工)으로 있을 때는 프라스코 유리병을 흔들며 연구를 하는 체 하면, 제3자가 보기엔 붕사의 함량을 조사한다는 학구적인 분위기였는데, 특수 화학공장이 평양으로 이전하고 인천에 남아있는 종업원을 재배치하자, 상호는 내화공장 선광공(選鑛工)으로 배치되어, 하루아침에 배우는 학생에서 노동자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다.
내화공장의 선광공으로 배치 받은 상호는 기술을 배운다는 당초의 꿈이 깨어지니, 공장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다.
장기 입원을 하면 양성공(養成工) 명부에서 제적을 한다기에, 양성공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 7월의 뙤약볕 아래 운동장에 나가 한 시간을 누웠어도 바라던 학질(마랄리아)은 오지 않고 피로만 쌓여 입원을 단념하고 공장 생활에 충실하기로 한다.
물자는 귀해서 암(暗)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쌀 한 가마니에 100원, 치카타비(일본 사람의 노동화) 한 켤레에 100원, 좁쌀포대로 재단한 것 같은 작업복이 100원을 호가하나, 가격만 형성되어 있을 뿐 실물은 없고, 가장의 월급으론 배급 쌀을 사는 것이 고작이며, 암 시장에서 생활필수품을 산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1945년 봄에 상호가 공장에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니, 도회지와 농촌의 생활하는 모습이 다르다. 춘천에선 신분의 차이를 몰랐는데, 충청(남)도 산골에는 봉건사상이 남아있어, 양반(兩班)과 중인(中人), 상민(常民)과 천민(賤民)의 구분이 뚜렷하다.
지주와 소작인, 마름(지주의 위임을 받아 소작인을 관리하는 사람)과 머슴, 면서기와 장사꾼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아무런 불평 없이 어울려 산다.
농촌에선 츠메에리(넥타이를 매지 않는 일본식 국민복) 양복을 입고 각반을 친 사람은 징용이나 징병으로 젊은이를 데려가거나 여자 정신대로 처녀를 잡으러 온 면서기로 오인되어, 농촌 사람들은 숨기에 바쁘다.
1944년 한 방에서 양성공으로 숙식을 같이하던 한(韓泳錫)군은 60년이 지난 지금은 춘천 여자중학교의 교장 직을 정년으로 퇴직하고 노후를 취미 생활로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