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참모부 허남욱 소령이 월남전에서 임기를 마친 장병을 인솔하고 귀국하는 제12 제대장(梯隊長)으로 명령이 났는데, 풍토병(眼疾)으로 입원하니, 그 직책이 상호에게로 떨어진다.
월남전에서 임기를 마친 장병이 보따리를 싸고 수송함을 타면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 데, 상호가 귀국 장병의 인솔책임을 맡게 되니 상황이 달라진다.
귀국준비가 늦었다고 생각한 상호는 귀국 장병의 소집공고를 요소 에 부치고, 귀국을 위한 제대장 업무를 시작한다.
귀국 장병의 화물을 연병장에 집결하는 날이다.
평소에 귀국 준비를 하였기에 당황하지 않고 짐을 쌀 수가 있었다.
보안대 부대장(副隊長)으로 있는 상호 동기생 오(吳淳錫) 중령이 소형 화물차로 짐을 호텔에서 사령부 연병장으로 운반해준다.
헌병대와 보안대의 검사를 마친 귀국장봉의 화물은 수송함에 적재하기 위해서 트럭에 실려 ‘캄란’ 항으로 보내진다.
상호는 오전 10시(1970. 10. 13)에 ‘탄손누트’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11시에 ‘캄란’ 비행장에 내려, 인접한 항구에서 귀국 장병의 화물이 수송함에 적재되는 것을 확인하고, 오후 4시에 귀국함 ‘바레트’ 호에 승선한다.
부산항을 떠나 월남으로 올 때도 ‘바레트’ 호를 탔는데, 월남에서 부산으로 갈 때도 ‘바레트’ 호다. 장병을 싣고 월남을 왕래하는 수송함은 두 척이 있는 데, 올 때와 갈 때 모두 같은 수송함이다.
다음날 아침 수송함은 고동을 울리며 ‘캄란’ 항을 떠나자, 상호는 파월 당시 부산항 제3부두를 떠나며 전쟁터로 간다는 찹찹하던 기분과는 달리, 월남의 전쟁터를 떠난다는 홀가분한 기분에 만감이 오간다.
상호가 부산항을 떠날 때는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부산항으로 돌아가는 보따리 속에는 나라에서 주는 무공 훈장과 월남 정부에서 주는 1등 명예훈장,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기장을 가지고 돌아간다.
배는 요동이 없는데, 태풍 ‘죤슨’ 호의 영향으로 상호는 속이 울렁 거려 음식을 목으로 넘길 수가 없다.
부산항에서 월남으로 올 때는 태풍도 안 불고 뱃멀미를 몰랐는데, ‘캄란’ 항에서 부산항으로 돌아 가는 뱃길에는 태풍의 영향으로 뱃멀미가 심하다.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온다.
바다는 잔잔하고 배는 항진(航進) 을 계속하는 데,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 때문에, 배를 탄 장병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갑판에 나와 난간에 기대서서, 바다와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족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한 무리의 장교들이 들뜬 기분으로 전쟁터를 누빈 역전의 용사답지 않게 실없는 대화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한 장교가 “우리 집사람은 이번에 전쟁미망인 학교에서 퇴교를 당했어”라고 하니, 옆에 있던 장교가 “우리 집 아이들은 군인 유가족 으로 시의원에 입후보했다가 낙선을 했어”라고 맞장구를 치며 살아서 돌아가는 기쁨을 만끽한다.
2002년 ‘보훈의 달’을 맞아 6.25사변 발발 제5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국가보훈처에서 문예작품 현상모집이 있다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상호가 1969년 5월 15일부터 1970년 10월 17일까지 1년 6개월의 월남전 참전 경험을 “내가 겪은 월남전쟁”이란 제목으로 응모했더니, 참전수기 부문에 당선되었다고, 서울 보훈지청 여자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이로서 1961년 6.25사변 제11주년을 기념하는 장병 문예작품 현상 공모에 “대결(對決)이란 제목으로 응모하여 소설 분야에 당선되어 참모총장의 상장과 함께 상금 3천원을 받았는 데, 상금 3천원은 런닝셔어츠 2매를 살 수 있는 금액이나, 41년이 지난 오늘은 상금이 85배로 올라 런닝셔어츠 170매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