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노병의 독백 - 월남전쟁-잘있어라 부산항 아

[35] 노병의 독백 - 월남전쟁-잘있어라 부산항 아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35] 노병의 독백 - 월남전쟁-잘있어라 부산항 아

0 1,977 2003.08.27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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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노병의 독백 - 월남전쟁-잘있어라 부산항 아

잘 있어라 부산항 아

오후 2시가 되어 수송함 갑판과 부두에 가설된 임시 무대를 중심으로 떠나는 장병과 보내는 가족, 단상에 앉은 각계각층 기관장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 보며 환송 행사가 시작된다.

임시 무대 마이크 앞에 선 기관장이 바다 건너 수송함 갑판 위에 도열한 장병을 향해, 월남에 가서 용감히 싸워 국위를 선양하고 몸 성히 개선하여 부산에서 다시 만나자는 요지의 환송사(歡送辭)를 한다.

행사가 끝나자 수송함은 고동을 울리며 서서히 뱃머리를 돌린다.

부두와 갑판을 하나로 이어주던 5색 테이프가 끊기며 환송객이 흔드는 태극기 물결이 힘차게 파도친다.

상호에겐 “빠앙...,” 하고 울리는 수송함 고동소리가 슬프게 들린다. 그년 들어 월남으로 떠나는 여섯 번째 교체병력이다.

상호는 제대장 정(鄭仁泰) 소령과 한 방(船室)을 쓰게 됐다.

계급이 높은 장교는 비행기로 가고, 수송함을 탄 영관 장교는 상호를 포함한 소령 셋이 전부다. 바다의 물결은 잔잔하고 뱃길은 순조로워, 상호는 배를 탔어도 방안(室內)에 있는 기분이다.

수송함이 부산을 떠나온 지 한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 쯤 우리 영해를 지났다고 생각하는 데, 조그마한 동력선을 타고 고기잡이 하던 어부 2,3명이 끌어올리던 그물의 인양작업을 멈추고, 수송함 장병들을 향해  두 손을 흔들고, 수송함 갑판에 모여 있던 장병들도 두 손을 흔들며 잘 있으라고 환호를 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보는 환송일 지도 모른다고 상호는 생각한다

아침에 식당에서 양식을 맛있게 먹었는데, 모만(飽滿)감을 느끼지 못해 떠나올 때 아내가 꾸려준 초밥과 계란을 먹으니, 포만감으로 만족하다.

상호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계란을 먹겠다고 내밀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던 아내를 생각하니, 가난한 나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자신을 생각하니, 운명이 원망스럽다.

저녁에 라운지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데, 배경과 구성이 서울 종로 4가 단성사에서 본 ‘셰인’괴 같다. 배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시간이 늦어진다.

밤 0시를 기해 시간을 한 시간 뒤로 늦춘다는 데. 상호는 시계바늘은 한 시간 뒤로 돌려놓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아침 일찍 일어난 장교가 시간이 한 시간 늦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식당에 갔더니, 필리핀 웨이터가 “노...,노”하고 손을 젓는 데, 어찌 된 영문이냐고 상호에게 묻는다.

배에 오르니 우선 실시하는 것이 안전 교육이다.

오전에 필리핀 군무원(軍務員)이 방으로 와서, 배에 불이 났을 때와 침몰했을 때를 가상한 소화훈련(消火訓練)과 퇴함훈련(退艦訓練)을 실시한다.

화재훈련은 구명대를 목에 걸고 선실에서 대기하면, 필리핀 선원이 와서 갑판으로 통하는 문을 잠그고 고무 호-스로 화재 현장에 물을 뿌리고, 퇴함훈련은 지정된 장소에 서 있는 것이 훈련의 전부다. 사병으로부터 위관 장교까지는 아침의 내무사열과 저녁의 안전검열을 선실에 도열해서 받는 데, 영관장교(領官將校)는 열외다.

위관과 영관의 차이가 피부로 느껴질 만치 다르다.

상호는 아침 식사를 소량으로 했는데, 소화가 안 되어 점심과 저녁은 가벼운 것으로 했다.

저녁에 방에 모인 장교들에게 소화가 안 된다고 했더니, 옆방에 있는 김(金炯五) 대위가 가스명수 한 병을 갖다 준다.

상호가 가스명수를 받으며, “초식에만 듣던 가스명수가 육식에도 듣겠느냐”고 반문하니, 방안에 모여 있던 장교들이 배꼽을 잡는다.

상호가 아침 식사를 죽으로 했는데 맛이 있었기에, 저녁에도 메뉴를 보고 죽을 시켰는데, 필리핀 웨이터는 찐 옥수수 한 보시기를 갖다 준다.

다시 ‘정어리볶음’을 시켰더니, 멸치만 한 정어리 10여 마리를 갖다 준다. 술안주 치고도 막걸리 한 잔의 안주감이다. 상호는 영어 단어를 보고 주문을 했는데, 기대하던 음식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없이 ‘치킨파이’를 시켰더니 밀가루에 말은 닭다리 한 개를 가져다준다.

상호 행동을 바라보던 다른 장교들이 “미 투우”하고 하나같이 “치킨파이”를 주문한다.

필리핀 웨이터는 60이 가까운 노인들인 데,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미군으로 징집되어 해군 군인으로 근무하다 전쟁이 끝나고 필리핀이 독립이 되었어도, 미 해군 군무원 신분으로 근무하고 있어 보수가 많다고 한다.

새벽 6시다. 상호가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아래층 사병들이 갑판으로 올라와 난간에 기대서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데, 선실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밖에 나가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쪽빛 바닷물과 푸른 하늘뿐이며, 바다 위엔 지나가는 배도 섬도 보이지 않는다.

멀리 뱃머리 쪽에서 둥글게 흰 줄을 그으며 ‘날치’가바다 위를 나는 데, 그 모습이 물새와 같다, 항해 4일 차인데 바다는 잔잔하고 배는 요동이 없다.

바다 밑에서 싸라기 같은 물방울이 줄지어 수면으로 올라와 부서지며 바닷물에 섞여 뒤로 흘러간다.

바닷물은 뒤로 흐르고, 수송함은 앞으로 가고 상호는 전쟁터로 찾아간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온다, 바닷물은 투명하리만치 맑으며, 물밑에선 돌고래가 떼 지어 배 가는 쪽으로 따라간다.

상호가 전쟁터로 간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 엎치락뒤치락 잠을 청해보나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맑아진다.

사방은 고요하고 하늘엔 샛별이 드문드문하고, 초생 달이 중천에 떠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데, 수송함은 서서히 ‘다낭’ 항으로 들어간다.

갑판으로 나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데, 미군 당직 장교가 갑판으로 올라와 상호를 보고, “배는 지금 필리핀을 지나 월남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라고 한다.

바다 위엔 월남 사람이 탄 조그마한 고깃배가 통통거리며 지나가고, 배를 본 장병들이 열심히 손수건을 흔들어도 배위 월남 사람은 장병을 보고도 못 본체 지나간다.

호지명(胡志明-越盟共産黨首) 생일이 4월 19일이라고 하는 데, 생일을 축하하는 ’베트콩'의 포격으로 ‘다낭’ 항 왼쪽 산골짜기는 검은 연기가 치솟으며 하늘을 가린다.

쪽빛 바닷물과 푸른 하늘, 수평선만 바라보던 장병은 치솟는 검은 연기를 보려고 발돋움을 치며 아우성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해병대 교체 병력이, A백을 메고 갑판으로 올라오며 모여 있는 장병을 보고 그동안 겪었던 전투경험을 들려준다.

발기발기 사지가 찢겨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아군의 시체, 나무 사이사이를 연결한 ‘부비트랩’의 가는 인계철선, 꼬불꼬불 이어지는 지하 동굴, 함정 속에 심어진 끝이 날카로운 대나무 창 등 ‘베트콩’의 전술을 들려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만끽한다.

상호는 ‘베트콩’ 게릴라전술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해병대 병사의 전투경험담을 듣고 있노라니 으스스하고 한기를 느낀다.

배가 남쪽으로 내려가며 ‘사이공’이 다가올수록 뜻 모를 공포감과 막연한 기대감에 불안감만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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