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키겠다고 하루살이 소위를 지원한 상호는 임관 2개월을 앞두고 휴전이 된다.
장교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울 마치고, 1953년 9월 19일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고 10일간의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아침이다.
추석이라 동네 젊은 이는 희색 무명(木棉) 양복바지에 하얀 무명 ‘와이셔어츠’를 입고 동 네 큰 집인 순태(洪淳泰)네 사랑방으로 모여든다.
육군소위 계급장 을 단 상호를 본 수태 어머니가, “헌병이 된다고 하더니, 헌병이 못 되고 육군소위가 됐구나, 우리 동네에도 헌병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군대에 들어가니 마음대로 안 됐던 모양이지...,”라고 하며 섭섭해 한다.
전쟁 기간 중 헌병으로 근무한 군인은 면내를 통해서 부호 (富豪) 로 소문난 쇠재(金峙里)의 김광재(金光在) 아들 동구(東九)뿐이다.
항간에선 헌병이 군대에서 가장 권력 있는 기관이며, 헌병을 배출한 동네에서 제출하는 각종 민원서류는 성의껏 해결되고, 소의 밀도살 같은 불법 행위도 헌병으로 있는 동구의 보복이 두려워 눈을 감으며, 부락 사람의 사생활에도 동구의 헌병 그림자가, 유형무형으로 영향 을 끼치고 있다.
전시라 군인을 제재하는 기관은 없으며, 어쩌다 헌병이 비리를 저질은 군인을 입건한다 하더라도, 곧 죽을 몸이라고 해서 입건은 없다.
휴가 나온 군인이 제일 먼저 묻는 것이 경찰이 우리 가족을 돌봤느냐고 묻는 것이 군인 된 자랑이오, 농촌에서 지서 순경에게 호통을 쳤다는 것은 저녁 상머리의 화재감이다.
상호가 군대에 나가면서 헌병이 돼서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우리 동네에서도 헌병이 나온다고 기뻐했던 순태 어머니가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고 돌아온 순태를 보고 섭섭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군대에 나가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더군요”라고 상호도 섭섭해 하는 순태 어머니를 달랜다.
군에서 헌병이 권력 기관이오, 육군 소위는 곧 죽을 몸이라고 알고 있는 시골 사람에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장날에 ‘한내’ 장에 나가면 허리에 권총을 찬 휴가 나온 군인이, 흰 글씨로 헌병이란 글자가 새겨진 완장을 두르고, 번쩍번쩍 빛나는 ‘화이바’ 모자를 쓰고 팔을 내저으며 시장을 활보하는 헌병은 누구도 범접 못하는 권력의 상징이다.
범골 물레방아 집 딸은 예산 여중 5학년인 데, 헌병으로 복무하는 훈식이와 약혼을 하고, 그 소문은 면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순 태네 안에선 사랑방에 모여든 동네 젊은이를 위해서 술상이 나오 는 데, 술을 못하는 상호는 떡접시를 비우고, 칭구인 중현(金重鉉)이를 대동하고, 재청(梁在靑) 아버지와 상연(朴商蓮) 아버지에게 군대 에서 육군소위로 임관하고 돌아온 인사를 한다.
고향에서 10일간의 휴가를 보내고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최전방에 위치한 보병 제12사단(사단장 陳容坤 准將) 보충대에 등록하고, 제37연대(聯隊長 金在命 大領), 제1대대(大隊長 李相俊 中領)를 거쳐 주저항선(主抵抗腺)에 주둔 중 인 제1중대(中隊長 安晴護 大尉)를 찾아가니, 주대본부는 고지 후사면 산허리를 파서 지은 막사다.
이 곳이 1031고지로 높이가 주변 일대의 산보다 높아 서, 전투 시에는 피아가 공격과 방어를 되풀이 하던 요충지로 전면의 시계(視界)가 환이 트이고, OP(작전 지휘소)에는 미군의 연락장교와 아군 포병의 관측 장교가 주둔하고 있으며, 일명 모택동 고지라고도 한다.
석양 노을이 질 무렵 중대장에게 신고를 마치고, 어둔 밤에 보직 받은 3소대에 당도하니, 소대는 8부 능선 산허리를 파서 만든 교통호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소대원은 새로운 소대장이 부임한다고 해서 모두 소대본부 막사에 모였으며, 대부분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이다.
성격은 부드러워 전쟁을 치른 역전의 용사답지 않게 양(羊)같이 온순하다.
전쟁 시에는 행정 단위로 군인을 모집했기 때문에, 영일군 병사가 많은 것에 수긍이 간다. 선임하사는 일등중사(현 하사)로 군인으로 소집되기 전엔 집에서 고무신 장사를 했다는 데, 부대 지휘는 요령과 계급으로 차질 없이 수행한다.
중대 장교라곤 중대장 혼자이고, 기타 소대장은 전투에서 모두 후송하고, 휴전이 된 지 2개월 만에 상호가 처음으로 보충되는 장교라고 한다.
장병들 눈은 벌겋게 충혈(充血)되어 있으며, 전령 김상근 하사(현 상등병)는 휴전이 되기 전에 전초 분대 기관총 사수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다가, 방어진지가 중공군에 점령당하고 퇴로를 차단당해 지하 동굴진지로 철수해서 1박 2일을 중공군과 대치했었다며,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을 살아온 경험담과 전투의 무용담이 대단하다.
전령인 김 하사는 군에 소집되기 전엔 영일군청 직원으로 근무했다는 데, 행동이 민첩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떨어지는 명령과 지시에 이해가 빠르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온 군인은 직업의 귀천과 학식에 관계없이 나라를 사랑한다는 붉은 마음은 같다고 생각한다.
1953년 12월의 어느 날이다.
선임하사 남실권 일등중사(현 하사)가 하사(현 상등병) 계급장을 단 병사를 데리고 상호를 찾아왔다.
선임하사는 같이 온 병사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포항이 고향이며, 작년 3월에 장에 갔다가 일이 잘못되어 군대에 나오면 안 될 사람이 군대에 나왔습니다.
나이는 41세로 집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셋인 데, 꼭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기에, 공격 시에도 집결지에 남겨두고, 방어 시에도 안전한 곳에 숨겼습니다.
다행이 휴전이 되었으니 후방에 나가서 집으로 가야 하는 데, 후방으로 나가기가 어렵다고 한다.
같이 온 병사는 일자무식으로 하는 일은 없어도 하사까지 진급했다.
가만히 있으면 무식이 탄로되지 않겠는 데, 소대장에게 진실을 말한다며, 할아버지 묘에 바람이 들어가서 자기가 허리를 못 쓴다고 한다.
상호는 군의관이나 심사관 앞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근심을 하니, 선임하사는 “정부 방침이 웬만하면 군대에 적합치 않은 사람은 제대를 시키니 내가 교육을 시켜서 후송토록 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선임하사에게 병사의 교육을 당부하고 대대 군의관에게, “소대원이 싸고돌아 살려낸 사병인 데, 일자무식일뿐더러 꼭 귀향해야 할 병사이니, 인간애로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니, 군의관은 알았다고 이해를 한다.
상호가 주둔하고 있는 고지로부터 후방 민간인 출입 통제선까지는 10Km가 넘으며, 매일의 일과는 공산군의 공격에 대비한 경비와 방어의 단조로운 생활의 연속이다.
겨울에 방어진지를 순찰하려면 허리까지 차는 눈 속을 교통호 위에 엎드려, 배가 물을 가르고 전진하듯, 눈 위를 기어서 전진한다.
모택동 고지에서 겨울을 나고, 다음해 봄에 걸어서 속초로 이동한다.
1954년 3월 속초로 이동하니 돈이 아쉽다.
산 속에 있을 때는 경계와 방어근무를 하는 단순한 생활이라 돈의 필요성을 몰랐는데, 민간인과 접촉하는 속초로 나오니 생활이 복잡하고 욕심이 생겨 돈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소대장 봉급은 한 달에 3만 5천원이오, 소대원 전체의 봉급이 4만원이라, 봉급날이면 교통호 선임하사 침실에 모여, 야전용 미제 촛불 밑에서, 소대장과 소대원 봉급을 합한 돈으로 사 온 막걸리로 하루 저녁 회식을 하고 나면 장병은 봉급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는 데, 민간인과 접촉하는 속초로 나오니 상황이 달라진다.
사단 보충대에 근무하던 ‘이필증’ 소위 생각이 난다.
1951년 1.4후퇴 때, 원산이 고향인 이 소위는 미군 LST를 타고 월남했는데, 사회생활을 하느라 모진 고생을 하고,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모 방직공장의 여자 반장으로 있다는 데, 사단으로 전입되자마자 이 소위는 보충대로 보직되어, 인사 관리장교로 근무하면서 매월 나오는 봉급은 장래를 위해서 후방의 약혼자에게 우송했다고 한다.
데리고 있던 병사가 탈영을 해서 이북으로 넘어가기 직전, 아군의 경계병에게 발각되어 경계병과 대치하고 있는 데, 직속상관이던 이 소위가 가서 귀영(歸營)을 설득하자 “너는 저승으로 같이 가야 할 인물”이라고 하면서 M-1 소총을 이 소위 가슴에 쏘고, 자신도 그 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일요일이면 상호는 부대 주둔지에서 속초로 나와 거리를 걸으며 두리번거리는 데, 카메라 상점 진열장에 전시된 카메라를 보니, 한 장, 한 장 넣다 뺏다 하는 상자 형 카메라가 아니라, 사진을 연속으로 찍으며 필름을 돌리는 신형 카메라다.
주머니를 털어 카메라와 현상약, 정착약과 인화지를 사서 방과 후 에 소대원의 사진을 찍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랜다.
전쟁 중엔 편지가 배달되지 않아 휴전이 되고 8개월이 지나도 병사들은 고향 소식을 궁금해 하고, 고향 부모들은 아들의 생사를 의심한다.
전방에는 사진관과 사진사가 없으니, 상호가 취미로 찍은 사진이지만 병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훌륭한 증거물이다.
사진을 찍은 인화지는 최소한 10시간을 물에 담가 두어야 인화지에 묻은 약 기운이 빠지기 때문에, 상호는 낮에 찍은 사진을 물이 있는 탄약통에 담가두고 잠이 들면, 보초를 서던 병사가 소대장실로 들어와 물에 담가둔 자신의 사진을 찾느라 “딸가닥”거리는 금속성을 들으면서 자는 체 한다.
1955년 5월이다. 속초에서 적의 공격을 대비한 방어훈련만 계속하고 있는데, 사단 전체가 춘천을 거쳐 경기도 연천으로 차량 이동을 한다.
지금은 부대는 지역에 남아있고, 장병이 움직이는 데 당시는 부대가 움직이며 지역에 익숙하라고 할 때다. 2년간 소대장을 했더니, 직책이 부중대장으로 승진되어 부대 훈련은 중대장의 책임이오, 부중대장은 중대본부에 남아서 행정을 책임진다.
날씨는 더운 데 두통이 심해서 행정 업무를 보지 못하겠다. 대대 군의관에 상의하니, 자기가 진단하기론 이상이 없다고 하면서 옆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에 가 보라고 한다. 대위 계급장을 단 미군 군의관은 상호를 진찰하더니 희 알약을 준다.
부대로 돌아와서 알약을 먹었는데, 세 봉지를 먹으니 두통이 가신다. 인사계(尹奇允 特務上士)가 말하기를 "부관님이 드시는 알약은 소금입니다.
날씨가 더워서 몸에 염분이 부족했던모양입니다)라고 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인턴 과정을 수습하는 데엔 군대의 말단 조직인 대대 군의관이 가장 적합하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새로운 진지에서 채 지형을 익히도 전에 후방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에서 소대장이 모자라, 전방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친 장교를 훈련소로 보내는 데, 상호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