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문정은)

하얀 눈(문정은)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하얀 눈(문정은)

0 8,858 2004.05.12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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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TV 뉴스에서 대학생 8명이 눈 속에 파묻히고, 3명의 시체가 발견되어 2명은 병원으로 후송되고, 1명은 내일 아침 시신을 수습하고, 남은 사람을 찾기 위해 수색작업을 계속하다고 한다.
눈보라치는 대관령의 고갯길은 1m이상 눈이 쌓이고, 고속도로가 막혀서 언덕을 넘어 서울이나 강릉으로 가던 자동차는 눈 속에 파묻혀 하룻밤을 고생했다고 한다.
  TV 뉴스를 보니 어린 시절에 겪었던 겨울 풍경이 떠오른다. 높은 집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면, 밤새 내린 눈은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얗게 싸여있어, 대나무로 만든 마당비로 눈을 쓸어 동네 큰 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오솔길을 터놓던 생각이 난다.

  40년 전 어린 나이로 시집가던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 다. 사람 키만큼이나 쌓인 눈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우물에도 못가고, 식수가 없어 눈을 녹여 마셔야 했다.
  남편이 전방에서 직업군인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다. 강원도 지역에서 야간 근무를 하던 군인 30여 명이 눈사태를 만나 눈 속에 파묻혀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남편이 전방에서 고생하고 있으니 고생을 나눈다는 뜻에서, 버선과 양말도 신지 않고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추운 눈길을 걸으며 고생을 사서 했다.

  정초에 휴가를 얻어 고향을 다녀간 친척집 ‘성목’이 조카가, 전방에서 남편을 만나 집소식을 전했으니 안심하라고 한다.
  남편은 휴가를 얻어 집으로 와선 2대 독자의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며 많이도 울었다.

  1년에 한번씩 있는 장교 정예신체검사에서, 남편은 폐가 나쁘다는 판정이 나와, 기록카드를 쫓아 원주 야전병원에 강제로 입원 하더니, 부산 3.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X-ray를 재판독한 결과 오진으로 판단되어 원대복귀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식구를 전방으로 데려갈 엄두도 못 내고, 본인은 원대로 복귀도 못하고, 서울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더 이상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가지 못하자, 유서를 써서 주머니에 넣고 방황했다고 한다.
  한강을 서성이다 물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시내로 들어와서 다방에 앉아 시름에 빠져 있는데, 관상쟁이가 다가와서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라고 하더란다.

  남편은 주머니에 유서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가당치도 않은 말을 한다고 한숨지었다고 한다.

  죽기로 작정한 몸이니 염치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고 결심한 남편은, 육군에서 계급이 제일 높다는 참모총장을 육군본부로 찾아가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보좌관에게, “식구와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애원을 해서, 우리는 남편의 바람대로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같이 살 수 있게 도와준 보좌관을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으나 세월이 흐르니 이름도 모르고, 마음으로만 고맙게 생각할 뿐이다.
  강원도 지역에 내린 눈이 1m 30cm가 넘는다고 하니, 40년 전에 내린 눈만치나 많이 내렸다.
  TV 뉴스 시간에 방영하는 눈보라를 보고 참상을 짐작할 수가 있다.

  빙벽타기훈련을 하는 대학생들이 빙벽을 타는 데 자신이 있어도, 실수라는 것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
  조난 당한 학생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제설작업을 하는 구조대원들의 활동을 보니, 옛날 일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창밖엔 오후의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쪼이고 있다.

                                                   
                                           (1998. 1. 18. 서울 논현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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