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또 영천으로 이사를 해서 셋방을 얻고 객지생활이 시작된다.
교육이 끝날 무렵 남편이 근무하던 수도사단이 월남전에 참전 하려고 한국을 떠나는데, 라디오 중계방송을 듣던 나는 한없이 울었다.
정들었던 군인들이 이역만리 전쟁터로 떠난다는 것이, 불안하고 마음에 걸려 월남으로 자주 위문편지를 보냈다.
부관학교에서 4개월간 영어를 배운 남편은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 육군 태평양정보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러 유학길에 오른다.
나는 또 친정에 이삿짐을 맡겨놓고 서울로 올라와 김포공항으로 가서 남편이 ‘오키나와’로 가기 위해 비행기로 출발하는 모습을 보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남편의 귀국을 기다린다.
4개월의 기다림 속에 매일은 보내고, 남편은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미군으로부터 영어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회화는 많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