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노병의 독백 - 잃어버린 15년

[63] 노병의 독백 - 잃어버린 15년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63] 노병의 독백 - 잃어버린 15년

0 1,904 2003.09.0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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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노병의 독백 - 잃어버린 15년

잃어버린 15년

기억 상실증이란 것은 초등학교 때 “마음의 행로”라는 영화를 보면서 교통사고로 머리에 충격을 받고 기억을 상실한 주인공이, 그 시점에서부터 새로운 생활을 하다가 어떤 충격에 의해서 다시 기억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기억을 상실한 채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만, 상호는 새로운 뇌가 손상된 뇌를 대신하는 데 14년이 걸린다.

군대에서 적과 싸우다 부상을 입은 사람은 국가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부상의 정도에 따라  생계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상호는 6.25 전쟁을 치르고 월남전에 참전을 했어도 머리로 싸웠으니, 총을 잡고 산야를 누빈 역전의 용사와는 사정이 다르며, 비교를 한다는 자체가 외람스러운 일이다.

상호는 늙어서 병을 얻고, “내겐 월남에서 얻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라고 그늘에서 눈물로 호소해도 소리가 없으니 메아리도 없다.

평생을 국토방위와 국가 발전에 기여했어도, 늙어서 병을 얻으니 호소할 곳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옷을 벗고도 연금에 의지해서 서울에서 살았는 데, 지병(持病)의 치료비와 약값으로 지출이 많으니, 본의 아니게 지방으로 이주를 강요당한다.

지금은 경기도 일산에서 살지만 집값과 생활비가 저렴하다는 충남 당진으로 이사를 가야 할 형편이다. 2001년 11월 15일 오전이다.

의사의 진단과 약을 타러 서울 둔촌동 보훈병원을 찾았는데, 30년 전 월남에서 같이 근무하던 전우 정만선 소령을 만난다.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왔느냐”라는 상호 물음에 정 소령은 “나는 1980년에 대령으로 예편하고, 10년 만인 1990년에 뇌출혈로 쓸어진 이후 당뇨병과 고혈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뇌출혈과 당뇨병, 고혈압이 모두 고엽제 후유증이란 사실을 알고 1995년 5월 국가 보훈처에 신고하여 지금은 국비환자로 등록되어, 진료비와 약값은 무료요, 매월 생계비의 일부를 보조받고 있으며, 오늘도 진료와 약을 타러 보훈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정 대령도 상호와 같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당뇨병과 고혈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데, 미국에선 당뇨병과 고혈압, 각종 질병이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이 앓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규정하여, 환자가 월남에 파병된 사실이 입증되면, 국비환자로 등록하고 진료비와 약값은 무료요, 매월 발병의 정도에 따라 생계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미국의 규정에 따라, 1993년 3월부터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이 제대 후에 병을 얻으면, 신체검사를 거쳐 고엽제 후유증 환자로 판정되면 국비환자로 등록하고, 진료비와 약값은 무료요, 매월 발병의 정도에 따라 생활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는데, 상호는 이 사실을 모르고 같은 병인데도 일반 병원을 전전하며 14년을 투병했 다.

투병을 계속하며 건강을 회복하니, 신경병보다는 신장병에 더 무게가 실린다.

상호는 당뇨병 중증(重症) 환자로, 좌안 실명에 기억 상실증, 고혈압에 신부전증, 심근경색증에 반신불수로 오른손이 마비되어 글씨를 못 쓰고 왼손으로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며 필기를 대신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상호도 정 대령과 같이 고엽제 후유증 환자인 모양인데 새삼 월남전을 생각한다.

보직을 받기 전에 야전에 나가 진중근무를 하며,  미군 코부라 헬기에서 뿌리는 고엽제 흰 가루가 안개가 내려앉듯 밀림 위에 가라앉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정 대령의 말을 듣고 원무 3과의 고엽제 담당 직원을 찾아가서 상의를 하였더니, 담당관은 주치의의 진단서를 가지고 관할 보훈 지청에 가서, 고엽제 담당관을 만나 상의를 하라고 하기에, 의사의 진단서를 가지고 의정부 보훈지청 고엽제 후유증 담당관을 만나 상의를  하였더니, “오늘이 2001년 11월 15일이니 2개월 후인 새해 1월에 본인과 보훈병원으로 통보가 가서 신체검사를 거쳐 고엽제 후유증 환자로 판정이 나면, 국비환자로 등록하여 병은 무료로 치료해주고, 발병의 정도에 따라 매월 생활비의 일부를 보조하겠다고 한다.

군인이 제대를 하고 병을 얻으면, 참전용사는 치료비의 50%를 국가에서 부담하고, 무공 수훈자는 60%를 부담한다.

상호는 6.25 사변을 치르고 월남전에 참전하며 많은 표창장과 무공훈장을 받고, 노년에 병을 얻어 투병을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건강을 염려해서 아침 등산을 하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데, 현관 우편함에 편지가 들어있다.

지난 1월 25일(2002) 서울 둔촌동 보훈병원에서 실시했던 신체검사 결과, 고엽제 후유증 환자로 판정되어, 국가유공자 지원에 관한 법률 제 4호 1항 4호 및 6호의 “전상 군경” 에 해당되고, 상이(傷痍)등급 7급으로 분류되어, 국가에서 병을 치료해주고, 매월 생활비의 일부를 보조하겠다고 11월 11일(2002) 까지 신분증과 도장, 사진 1매를 가지고 의정부 보훈지청 관리과로 출두하라는 통지서다.

다음날(10. 9) 아침 상호가 일산에서 출발하여 의정부 보훈지청에 도착하니 12시 30분이다. 점심시간이라 직원이 없을 줄 알았는데, 2,3명 남아있는 직원 가운데 고엽제 후유증 담당 직원도 남아있다.

지난번 고엽제 후유증을 신고할 때 얼굴을 익혀서인지, 상호를 보고 반갑게 맞아준다. 고엽제 담당 직원이 신분증과 사진, 도장을 요구 하기에 3가지를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국가유공 상이자 신분증과 무궁화 호 승차권 교환용지 6매를 만들어준다.

그리고는 국가유공 상이자가 누릴 수 있는 보훈 혜택을 설명한다.

상호가 월남에서 귀국한 지 32년, 고엽제 후유증으로 발병한 지 15년 만에 국비환자로 등록되어, 나라에서 병을 진료 받고, 약도 무료로 복용하게 되었다.

1930년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상호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노년에 병을 얻어, 발병한 지(1987. 5. 3) 6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고, 2002년 10월에는 상이군인으로 인정받아, 국가에서 병을 치료해주고, 생활비를 보조하며, 죽을 때도 미련 없이 가도록 국가에서 배려하며, 상호 부부에게는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부여하고, 상호가 죽어도 상호가 받던 연금의 70%를 아내가 승계한다니, 상호가 평생을 꿈꾸던 소박한 꿈은 모두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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