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도조(賭租-토지를 빌려주고 그 대가로 수확량의 50%를 받는 토지 임대제도)를 받아 생계를 이어가던 상호네는 군정 청에서 공포한 토지개혁령으로 지주와 소작인이라는 토지 임대제도가 없어지고, 토지가 지가증권(地價證券) 한 장으로 정부에 수용되고, 소작인은 신고만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토지를 분배받아 자작농 민이 된다.
생활의 터전을 잃은 상호는 먹고 살아야 하겠는 데, 땅이 없어 농사는 못 짓고, 살기 위해선 장사를 해야 하겠는 데, 상호 수중엔 장사할 밑천이 없다.
지금 생각하니 사회의 대 변혁기이며 지주가 몰락하던 시기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먹는다고 하는데 상호네는 소지주로서 당장 생활의 위협을 받으니, 어떠한 형태로든 움직여야 한다. 밤에 국유 림인‘봉수산’에 올라가 곧게 뻗은 애솔을 베어 와서, 다음날 아침 왜낫으로 줄기를 훑으면 두께가 0,1mm에, 1cm 넓이의 대패밥 같은 줄기가 훑어진다.
훑어낸 줄기 끝을 뾰죽하게 깎아서 유황(硫黃)을 발라 10개를 한 묶음으로 묶어서 지게에 짊어지고 시장으로 나가면, 어두운 밤을 밝 히기 위해서 들녘에 사는 장꾼이 사간다.
이것을‘깎끼’라고 부르 며 돈 없는 사람이 장사 밑천을 마련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상호가 1년 동안 여러 장을 돌며 ‘깎끼장사’를 하였더니, 지게를 짊어지고 장을 도는‘뜨내기’장사꾼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여러 장을 도는 장돌뱅이를 할 수 있는 장사밑천이 마련된다.
장사밑천이 마련된 상호는‘깎끼장사’를 고만두고 전라북도 군산 에 가서 무명(木棉)을 사서 포목 장사로 변신한다.
무명의 주산지는 전라북도 순창이지만, 서해를 끼고 있는 군산은 중국과의 밀거래가 한창이어서, 모든 물건의 집산지로서 물건의 유 통이 활발하다. 정부 당국에선 전쟁 수행용으로 생산하던 광목을 민 수용으로 돌리지만, 국민의 절대 수요량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장돌뱅이는 뜨내기장사, 잡화장사, 포목장사, 고무신장사, 비단 장사로 구분하는데, 무명을 파는 포목장사는 비단장사와 고무신장사 다음으로 돈 많은 장사꾼으로 분류한다.
각 가정에선 벼틀을 차려놓고 재래식 방법으로 여름엔 모시와 삼 베, 겨울엔 무명과 명주를 짜서 시장에 들고 나가 돈과 바꿔 가계 에 보태 쓴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살기가 좋아서, 명주나 삼베 는 재래식 필목(疋木)이라 하여,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고가 (高 價)에 거래되지만, 당시는 벼틀을 차려놓고 벼를 짜는 것은 부업으 로 농가에선 일반화 된 현상이오, 주업은 쌀농사에 의지하던 시대 라, 손으로 짜는 필목(疋木)은 가계(家計)의 30%를 점유(占有)한다.
모시는 충청남도에서만 생산되고, 여름에 짜기 때문에 원거리를 운반하면 더운 날씨에 모두 부스러져 상품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에, 집산지(集散地)가 형성되지 못하고, 생산지 장터의 새벽시장이 모시 를 거래하는 시간이다.
서울에선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을 중심으로 국군을 창설하려고 거리에서 군인을 모집하는 데, 공산당은 사상을 위장하기 위해서, 모병에 응모하고, 일반인은 군복에 매료되어 응모를 한다.
일본 사람이 물러가니 위정자는 문맹을 없애는 것이 나라 발전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여 교육정책을 강화하고, 배움에 굶주린 어린이 는 학교 문을 노크한다.
상호도 학교는 가고 싶으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 취학을 단념하고, 장이 없는 날이면 등 넘어 3종 아저씨 서당에 가서 한문 을 배운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조아리며,“하늘 천, 따지 하고 천자문을 배우고, 상유천하고 하유지하니 하며, 계몽편을 거 쳐, 재왈(子曰) 위선자는 천이 보지 이복하고 하는 명심보감과 원 형이정은 천도지상이요”하는 소학을 배우지만 신학문에 대한 갈증 과 동경은 막을 길이 없다.
쉬는 시간이면 서당 선생은, 일본 놈이 경술(庚戌)년에 영친왕 (英親王)을 볼모로 끌고 가더니, 을유년(乙酉年-1945)에 조선을 토 했으니, 빨리 영친왕이 돌아와서 임금 자리에 앉고, 3정승 (영의정, 좌정승, 우정승)과 6판서(예조,공조,호조,병조,이조,형조)를 임명 하고, 바른 정치를 해야 백성이 잘 살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되뇐다.
상호는 조정의 관직은 모르지만 3정승, 6판서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하며, 평생에 서울로 올라가서 임금이 살았다는 대궐을 보는 것이 꿈이다. 58년이 지난 지금, 상호는 청와대에서 근무한 사실이 있으니 어렸을 때 꿈은 이룬 셈이다.
장에서 물건을 팔다가 장이 파하면 난전(책을 파는 노점)에 가서 국학대학에서 발행한 중학 강의록을 사서 저녁이면 호롱불 밑에서 “나는 학생이다(Iam school boy...,)"하고 영어를 배운다.
상호는 장에 가느라 신작로에서 가방 들고 학교 가는 한동네 친구 (尹免赫)를 만나면 “가갸 거겨...,하고 언문(諺文)을 배우는 것 보 다는 맹자 왈...,공자왈”하고 한문을 배우는 것이 장래성이 있다고 궤변(詭辯)을 하면서도, 멀어져 가는 친구의 뒷모습에서 신학문을 배우는 그의 처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상호와 학문의 이론(理論)을 따지던 그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고, 시간을 선용하느라 낚시로 소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