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위 계급장을 달고 훈련소 교육연대에서 교관단(敎官團長 金英鎭 中領)으로 전속하여 각개전투 교관으로 있으며, 나이어린 문정은 처녀와 결혼을 한다.
지금은 모두가 결혼엔 애정을 앞세우나, 당시는 전쟁 끝이라 애정보다는 결혼 자체를 중요시했다.
1957년 음력으로 5월 10일, 처녀 집 마당에서 구식으로 결혼식을 거행한다.
지금은 예식장이 있어서 결혼은 모두가 예식장에서 거행 하지만, 당시는 종교를 가진 기독교인이라야 교회에서 서양식으로 신랑은 Duxedo를 입고, 신부는 Wedding dress를 입으며, 일반 인은 집에서 차일(遮日)을 치고, 초례청(醮禮廳)을 차리며, 신랑은 사모관대에 목화를 신고, 신부는 원삼을 걸치며, 얼굴엔 여지곤지를 찍고, 머리엔 족두리를 쓰고 용잠(龍簪)을 끼고 혼례를 올린다.
당시엔 일본 식민지 때에 일본 사람이 양력을 써서, 한국 사람은 은연중 음력을 쓰던 습관이 남아서, 음력이라야 가내 행사에 실감을 느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양력이 생활화되어, 그 이후의 가내 행사는 자연스럽게 양력으로 통하지만, 그 이전의 가내 행사는 음력으로 표현해야 실감이 나는 상호 세대(世代)다.
군대에선 2년마다 전방 근무와 후방 근무를 교대로 하는 제도가 있어서, 가정생활이 안정됐다고 생각하면 보따리를 싸고 이사를 가야 하기 때문에, 전후방 교류 생활을 반복하다보니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일반 공무원보다 직업 군인들이 경제에 항상 쪼들린다.
상호도 결혼한 지 2개월 만에 전후방 교류 계획에 따라 전방으로 명령이 난다.
보병 제3사단 제22연데 제1중대 부중대장으로 보직을 받고, 미처 지형도 익숙하기 전에, 매년 실시하는 장교 신체검사에서 결핵으로 판정되어 사람보다 먼저 기록카드가 야전병원으로 보내진다.
몸에 이상이 있으니 장교 생활은 부적합하고, 이제부턴 제대를 위한 수순을 밟아야 한다.
기록카드를 쫓아 원주 야전병원에 입원하고, 부산 육군 정양원으 로 후송된다.
정양원은 전투에서 손발이 잘렸거나 중상을 입은 상이 군인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국가에서 숙식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곳이다.
이들의 일과는 아침에 접객 여성에게 돈을 빌려주고, 저녁에 원금 과 이자를 합쳐서 수금하는 것이며, 여름이 되면 영농을 한다고, 수족이 있는 상이군인이 몸통만 남은 상이군인을 업고, 기업인을 찾아 전국을 일주하며 가을에 정양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군의관이 상호의 X선 사진을 다시 판독한 결과, 전방에서 X선 사진을 오판(誤判)했다고 영등포 보충대로 명령을 낸다.
이 승(乘) 에서 저 승으로 갔다가 저 승에서 이 승으로 온 것이다. 정양원이 제대를 앞둔 장교의 대기소라면, 보충대는 장교가 현역 부대로 가기 전의 대기소다.
상호가 영등포 보충대로 전속한 지 1주일 만에 (1958. 4. 18) 경북 대구 에 있는 육군정보학교(校長 金判植 大領)로 전속 명령을 낸다. 교수부 기능학과에서 1개월의 연습 끝에 연구 강의를 통과 하니, 전남 광주에 있는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과정으로 입교 명령을 낸다.
상호는 6개월의 교육이라 가족을 동반할까도 생각했으나, 어머니 가 병석에 누워있어 가족은 대구 비산동에 남겨두고, 혼자서 육군 보병학교로 떠난다.
교육을 받을 때는 신혼이라 토요일 오후에 송정 리 역에서 기차를 타면 다음날 새벽에 대구 역에 도착한다.
낮 시간을 가족과 같이 지내다, 오후 10시 밤차에 오르면 객차는 만원이라 사람이 다니는 통로에 쪼그리고 앉아 졸다가, 다음날 새벽 송정리 역에 내려서 보병학교 교실로 들어가면 8시에 시작하는 교육 개시 10분전이다.
집으로 가기 위해 토요일 오후 송정리 역에서 무연탄 실은 화차 위에 누워서, 서늘하게 빛나는 샛별을 바라보며 대구로 향한다.
무연탄 실은 화차는 사람의 승차가 금지돼있지만, 발 디딜 틈도 없는 객차보다는 혼자 누워있는 공간은 자유롭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간혹 눈에 띄는 역무원도 보고도 못 본 체 지나간다.
군인의 신분이 라 일반인은 누릴 수 없는 특권(?)을 상호는 누린다는 생각에 짜릿 한 희열감을 느낀다.
6개월 동안을 대구와 송정리를 오가면서도 성적은 우등으로 석차는 6등을 하여 만족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6.25 사변이 발발하자 많은 전투부대와 행정지원 병과학교가 창설되며 민간인 소유의 토지를 징발하여 부대가 주둔하고, 각급 학교 교실을 빌려서 병과학교가 창설됐는데, 휴전이 되고 정세가 안정되자, 정부에선 부대 주둔지를 따로 마련하고, 징발한 토지는 소유주에게 돌려준다.
행정지원 병과학교도 자체 건물을 세우고, 빌려쓰던 교실은 학교 당국에 반환한다.
대구와 경산으로 흩어져 있던 육군부관학교, 헌병 학교, 정보학교, 경리학교도 영천에 학교 건물을 짓고 이동을 한다.
1958년 가울 상호도 소속한 학교를 따라 영천으로 이동하니, 조용하던 농촌 도시가 하루아침에 군사도시로 변하고, 시민의 생활에 윤기(潤氣)가 돌며 경제활동(經濟活動)도 활발해진다.
상호도 가족을 데리고 영천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데, 중풍으로 누워있는 어머니가 계셔서 이사하기가 어렵다.
영남 사람들은 사회 생활이 활발해서 가족이나 생활상을 미리 말해야 뒷말이 없다.
방을 얻기 전에 가족의 구성원을 설명하니 모두가 방주기를 기피한다.
상호는 가족을 데리고 대구에서 영천으로 이사도 못가고, 여태까지 살던 대구 교외 팔달교 건너에 있는 자전거포 집에 눌러 살기로 한다.
상호가 대구 시내에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방 구하기가 어려 워 팔달교 다리 건너 자전거포 하는 집에, 비어있는 행랑이 있어 주 인에게 사정해서 방을 드려 살고 있다.
행정상으론 경북 칠곡군에서 영천군으로 출, 퇴근을 하니, 편도에 3시간이 걸린다.
새벽 5시에 집을 나가면 저녁 9시가 돼야 집으로 돌아온다.
육군정보학교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논산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로 전속 명령이 난다.
제2훈련소는 상 호가 소위와 중위 때 근무한 적이 있어 낮 설지는 않았으나, 임지(任 地) 로 가는 데엔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느라 가족들 의 고생이 많았다.
1957년 6월, 육군 제2훈련소로부터 1959년 5월까지 24개월 동안을 강원도와 경상북도, 서울과 전라남도를 돌아 전에 근무하던 논산으로 다시 오기까지 24개월 동안을 전전하다보니, 가족과 살림 을 한 기간은 정보학교의 5개월뿐이다.
2년 동안 7개 부대를 옮기는 데, 지금 생각하니 명령에 따라 죽고 사는 몸이지만 2년 동안 7개 부대를 전전하게 한 것은 좀 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1959년 여름 정부에선 6.25 사변이 발발하고, 대학생 신분으로 전쟁에 참가한 사람을 학교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제대를 시키고, 육군 제2훈련소에서도 중학교(舊制)만 마친 군인에게 면학의 기회를 부여한다.
서울에선 국민대학에서, 전라북도에선 원광대학에서, 전라남도에선 조선대학이, 군 장병이 학업을 계속 하도록 기회를 주며, 전속을 하는 장병들도 면학을 희망하는 장병은, 장병을 받아주는 대학교 소재지로 전속을 희망한다.
장병이 면학을 할 수 있는 대학은 모두가 사립으로 대학 총장의 재량으로 결정이 되는 데, 육군 제2훈련소 소장이던 박병권 소장은 옛날 은사이던 전북대학교 총장 고형곤 박사를 찾아가서 장병의 면학 기회를 애원하여, 국립으론 유일하게 논산 지구에 분교를 설치하여 제12기와 13기를 배출한다.
상호도 대학교에 등록은 하였으나,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쪼들리는 생활은 견디기 힘들다.
지금 생각하니 국문학과에 출강하던 선생은 전주고등학교의 고 신석정(辛夕汀) 교수, 전북대학교의 최승범(崔勝範) 교수와 강철종(姜喆鐘) 교수, 군산대학교의 고헌(高憲) 교수다. 군에서 필요로 하는 교육은 군사학교를 설치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장병을 외국에 보내서 교육을 받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