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은 남한을 적화 하려고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케 함으로서 동족끼리 싸워야 하는 6•25사변이 발발하고, 국군은 38선에서 인민군과 싸우며 서울을 거쳐 대전까지 밀리자, 한국을 구하려고 UN의 결의(1950.6.27)에 따라 정예부대로 소문난 미 육군의 “스미스”부대(미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UN군의 선봉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오산 남방에서 인민군과 조우(1950. 7.5)하여 전투를 하였으나 뒤로 밀리며, 국군도 전투를 거듭하며 38선에서 대구의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리고, 인민군은 적화통일을 목표로 부산을 향하여 낙동강방어선을 뚫고 대구로 침공하려 하자, 일본주재 염합군총사령관인 미국의 “맥아더 원수(MacArthur Douglas 元帥 1888-1964)”가 UN군사령관 자격으로 국군과 UN군을 거느리고, 인민군이 남침한 지 82일 만에 인천에 상륙(1950.9.15)하여 서울을 수복(1950.9.28)하고, 대구까지 밀렸던 국군과 UN군도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여 패퇴하는 인민군을 추격하여 38선을 넘어(1950.10.1) 북으로 진격한다.
중국대륙을 통일(1949.10.1)한 “모택동(毛澤東)”은 국군과 UN군이 쫒기는 인민군을 쫓아 압록강을 건너 중국대륙(만주)으로 넘어오리란 판단 아래, 오랫동안 중국대륙에서 “장개석(蔣介石)”군대와 싸워온 ‘팔로군(八路軍)’과 ‘조선의용군’을 압록강을 건너 만포(평안북도)와 강계(평안북도), 장진(함경남도)까지 진격(1950.10.25)시키고, 일부는 초산(평안북도)으로 진격하며 한국전에 개입한다.
동부전선에서 국군과 UN군이 38선을 넘어 장진과 강계로 진격(1950.11.26)하여 남포를 위협하자, 중공군은 압록강을 향해서 진격하는 아군을 포위하여 함흥(함경남도)에서 퇴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개시하며, 서부전선에선 초산으로 진격한 중공군이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수색대와 조우(1950.11.26)하여 전투를 하며 희천(평안남도)에서 퇴로를 차단하고 압박을 가한다.
국군과 UN군이 인천과 대구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73일(1950.11.27) 만에, UN군사령관(맥아더 장군)은 국군과 UN군에게 전 전선에서 철군하도록 명령을 한다.
동부로 진격한 국군과 UN군은 흥남항(함경남도)으로 집결하여 미 해군 수송함을 타고 부산항으로 철군(1950.12.5~12.24)하고, 서부로 진격한 국군과 UN군은 도보로 운산과 평양을 거쳐 추위와 싸우며 험난한 산을 넘어 38선 이남으로 철군(1950.12.5)한다.
국군과 UN군이 38선 이남으로 철군하고,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여 38선을 넘어 남침을 계속하자, 정부에선 현역과 예비역의 2원제로 운영하던 군사조직을, ‘국민방위군’이란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여 3원제로 운영하기로 하고, 만17세로부터 40세까지의 장정을 제2국민병으로 소집하여 전선으로 투입 공산군과 싸울 신병의 자원으로 활용하기로 하고, 입법예고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서울과 경기도, 충청 남, 북도에 거주하는 장정을 소집(1950.12.15)하여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경남 고성과 통영, 삼천포 등 해안가 주요도시로 후송하여 휴교중인 각급 학교에 수용하고, 공포(1950.12.21)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새로 창설된 ‘국민방위군’사령관엔 현역 육군준장(金潤根)을 임명하고, 부산으로 피난 온 대한청년단 본부의 간부직을 맡았던 임원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켜, 일부는 대령 계급장을 달아주며 운영을 맡기고, 대원이 주둔하는 경남 해안가 주요도시에 수용한 각급 학교는 신병을 보충하는 대기 장소요, 송출기관으로 교육대란 명칭을 부여하여 ‘국민방위군’ 중령으로 임관시킨 임원에게 운영을 맡기고, 온양읍의 ‘방위군사관학교’를 나온 방위군소위에겐 각급 학교에 수용한 ‘국민방위군’의 인원관리를 맡긴다.
서울에서 초등학교(孝悌初等學校 校長 鄭儀成) 교원으로 근무하던 나는 6•25사변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피난 가서 적치(敵治) 하에서 3개월을 숨어 지내며 사회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데, 공산 치하에서 주권이 회복(1950.9.15)되고, 미국의 “맥아더 장군(UN군)”이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치안이 회복되었다는 소문(1950.10.20)을 듣고, 학교로 복귀해 숙직실에서 침식을 해결하며 개교(開校)를 기다린다.
경향 각지로 피난 갔던 교직원은 복귀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등교를 하지 않아 학교는 본래의 기능을 찾지 못하고 교실(敎室)은 비어있어 유령이 사는 건물로 보인다.
숙직실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1950.12.7)데, 헤드라이트를 켠 UN군 차량이 학교 운동장으로 들이닥치고, 2,3명의 장교가 군화를 신은 채로 숙직실 문을 열더니 잠자리에 들려는 나를 보고 하는 말이, “당신은 영어를 할 줄 아느냐?”라고 묻는데, 나는 이 학교 선생으로 영어는 안다고 대답하자, “우리는 인도군 야전의무대 장교이며, 당분간 이 학교를 접수하여 주둔합니다”라고 한다.
학교 정문엔 미제8군사령부에서 징발한 건물(EUSAK FOR RESERVED)이란 조그마한 판자가 붙어 있어, 나는 왜 학교 당국의 승낙도 없이 미제8군사령부 임의로 학교를 징발했다는 간판을 부쳤나 의심이 갔었는데, 철군하던 인도군 야전의무대가 미제8군에서 징발한 건물이란 표지를 보고 학교로 들어온다.
운동장에 개인천막을 치고 하룻저녁을 야영한 인도군 야전의무부대는 다음날 아침 정문에 보초를 세우고 교실로 들어가며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킨다.
내가 교문을 오가며 용무를 보는데, 인도군은 식사 때가 되면 밀가루를 반죽 해 얇게 밀어 석유풍로(石油風爐)로 구워 ‘C레이숀(미군 야전용 식품)’에서 나온 강낭콩을 얹어 포크나 나이프를 쓰지 않고 오른손으로 먹고, 물 담긴 깡통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날씨가 초겨울이라 노상엔 살얼음이 깔렸는데, 인도군은 수도꼭지에 고무호스를 대고, 물을 받아 옷을 입은 채로 몸을 씻는다.
알고 보니, 인도사람은 포크나 나이프를 쓰지 않고 오른손으로 식사를 하며, 화장실에서용무를 마친 후엔 항문을 화장지로 닦지 않고 왼손을 사용해서 물로 씻으며, 오른 손은 식사 하는데 만 사용한다고 한다.
인도는 더운 나라라 옷을 입은 채로 목욕을 하고, 맨손으로 식사를 하며, 화장실에선 휴지대신 물로 항문을 씻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한국에 와서도 습관대로 생활을 한다고 한다.
학교로 복귀한 교직원은 영어를 모르고, 보초 서는 인도군 병사는 한글을 모르며, 학교 교실은 인도군 야전의무대가 사용하고 있으니, 학교 교직원이라 하더라도 신분을 몰라 보초는 출입을 금지시킨다.
아침(1950.12.10)에 자고 나니 3,4일을 학교에 주둔하던 인도군 야전의무대는 밤사이 철수하고 교실은 비어 있다.
가깝게 지내던 이(李啓植) 선생이 아침 일찍 나를 찾아와(1950.12.12) 하는 말이, “내일 아침 10시까지 탑골공원으로 모이라는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나왔는데, 박 선생에게 작별인사도 할 겸 정든 교실도 둘러보고 싶어서 학교를 찾았습니다”라고 하며, “신체검사를 마치면 기차를 타고 대구 보충대로 내려가 입영절차를 마치고, 한 달 동안 M-1소총의 분해결합과 총기의 조작법을 익히면 전선으로 투입되어 공산군과 싸우게 됩니다” 라고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하루 종일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린다.
학교에서 주둔하던 인도군이 철수하고 주인 의식을 되찾은 나는, 숙직실에서 일찍 저녁을 먹고 혼자 곤하게 잠자고 있는데, 새벽(1950.12.18)에 6촌 매부(李庚先)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처남에게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나왔는데, 아침 10시까지 용산 효창초등학교로 침구(寢具)를 가지고 나가라” 라고 한다.
서둘러 덮고 있던 이불을 말아 배낭에 쑤셔 넣고, 효창초등학교를 찾아가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군인과 같은 복장을 한 대한청년단 단원이 응소자를 모이게 하더니 호명을 하며 중대를 편성하고 말하기를, “정상적인 계획에 따른다면 여러분은 신체검사를 거쳐 합격자만을 기차에 태워 대구 보충대로 보내서 총기 조작법과 군사훈련을 마치곤 현역군인으로 전선에 투입해야 하는데, 중공군의 진격이 빨라 신체검사를 할 시간이 없어, 목적지까지 걸어가서 입영절차를 밟게 됩니다. 여러분은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제2국민병으로 소집된 군인이니 명령과 지시에 순응하십시오”라고 말하더니, 대오(隊伍)를 정리하여 앞뒤에 서서 부대를 인솔한다.
응소자 모두가 학생이나 청년으로 학교나 청년단체에서 제식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인솔자의 명령과 지시에 순응하며 질서는 정연하다.
부대가 용산을 떠나 덕소초등학교 교실에서 일박을 하고 양평에 도착하니, 주민 모두가 피난을 떠나고 도시 전체가 비어 있다.
빈 집에서 하룻저녁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부대를 인솔하던 대한청년단 단원이 우리를 집합시키고 말하기를, “여러분의 아침 식사는 양평초등학교 정문 앞에 준비하였고, 다음 목적지는 여주초등학교인데, 용산을 떠날 때 12월 18일 떠났으니 ‘18부대’라 부르고 알아서 남하 하며, 우리는 목적지에서 여러분을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하며 개인행동을 허락한다.
부대가 여주를 향해서 걸어가는데, 오후에 대신면(大新面) 벌판을 지날 때다. 농민들이 무리지어 고구마가 들어있는 가마니를 길가에 내다놓고, “이것은 우리가 농사지은 고구마인데, 인민군이 먹는 것보다는 여러분이 자시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도 집을 비우고 여러분의 뒤를 따를 것이니 부담 없이 잡수시요”라고 하며 생고구마를 먹으라고 권한다.
대신면을 지나며 민가(民家)가 없어 저녁은 굶고, 깊어가는 밤중에 여주초등학교를 찾아 국도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신작로가 끊기고 커다란 하천이 앞을 가로막는다.
국군이 남침하는 공산군(인민군과 중공군)의 진격을 늦추려고 교량을 파괴하고 철군하니, 양평에서 여주로 이어지는 국도는 여주강을 사이에 두고 교통이 끊긴다.
여주초등학교를 찾아가야 하는데 물이 깊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얕은 곳을 찾아 강둑 아래위를 헤매다 여울을 만나 먼저 건넌 사람의 뒤를 따르는데, 배꼽까지 물이 올라오니 면도날로 국부를 도려내는 아픔이 온다.
강 건너에선 먼저 건넌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강물에 들어선 우리를 향해서, “여이샤..., 여이샤” 하며 용기를 준다.
강을 건너 여주초등학교를 찾아간 우리들은 학교에서 일박을 하고, 아침 일찍 정문 앞 책상 위 바구니에 담겨있는 주먹밥 하나씩을 지급 받곤 남하를 계속한다.
아침은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점심은 11시부터 13시까지, 저녁은 16시부터 18시까지 관공서 정문 앞에서 지나가는 방위군에게 무료로 주먹밥 하나씩을 주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주먹밥은 없어진다.
잠시 집을 떠난다고 생각 하거나, 군에 입대하는 줄 알고 돈을 넉넉히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은, 길가에서 파는 음식물을 사 먹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잡고 걸어야 하며, 후송하는 ‘국민방위군’ 대열에서 희생자가 많이 생긴 것도 이 까닭이다.
종착지도 모르고 남쪽으로 10여일을 걸어가니, 노상엔 방위군 대열과 함께 피난민 대열이 하얗게 이어지고, 허기와 보행에 지친 방위군 대원이 군데군데 길가 잔디밭에 누워(죽어) 있다.
‘국민방위군’ 대열에 섞여 남하를 계속하던 퍼런 군인작업복의 ‘청년방위대(준군사조직)’ 대원이 누워있는 방위군 대원 가까이 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꼬부리고 잠든 대원을 향해서 거수경례와 묵념을 하더니 돌아서서 오던 길을 재촉한다.
나는 국도에서 샛길로 접어들어 인적이 드문 청도 뒷산 고개를 넘어 부락으로 진입하려하는데 부락 입구를 지키던 동네 젊은이에게, 부락의 동정을 살피러 온 빨치산으로 오인되어 청도경찰서로 연행되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현장을 도망친다.
청도 뒷산을 빠져나와 본대와 합류한 나는 마산극장에서 일박을 하고, 진동을 거쳐 18일 만에 고성읍에 당도하니, 어제 오후에 공산군이 서울로 입성(1951.1.4)하고, 서울을 방어하던 국군은, 중공군에 밀려 한강 이남으로 철군 했다고 하는데, 신문에선 중공군 100만 명이 한국전에 개입하여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국군과 UN군을 서울에서 밀어냈다고 보도하며, ‘인해전술’이란 술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제2국민병으로 소집된 장정이 중공군의 진격이 빨라 신체검사를 생략하고 남쪽으로 후송한 대원의 신분은, 새로 공포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르는 현역군인의 일종이며, 기존 군인은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은 예비역으로 편입하여 집에서 쉬게 하는데, 새로 생긴 ‘국민방위군’은 제2국민병으로 소집된 장정이라 예비역 군인의 신분이지만, 군 복무를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는 예비역이 아니라 군 복무를 할 예비역으로, 군법을 적용받는 준 현역으로 학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순서에 따라 전선으로 가서 현역군인으로 편입되어 공산군(인민군과 중공군)과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미리 와 있던 인솔자는 남쪽으로 내려온 우리 ‘국민방위군(용산)’ 600여명을 고성농업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100명 단위로 중대를 편성하여 교실에 수용 한다.
정문 기둥엔 학교 간판과 나란히 ‘국민방위군’ 제6교육대란 간판이 내 걸리고, 학교에 수용된 방위군은 끼니마다 소금물로 빚은 주먹밥 한 덩이와 국으로 나오는 바닷물로 끼니를 때우며 트럭을 타고 대구 보충대를 거쳐 전선으로 가서, 현역군인으로 편입되어 공산군과 싸울 날을 기다린다.
학교 숙직실엔 상인이 들어와 떡(인절미)과 담배(長壽煙)를 파는데, 그것도 돈 있는 사람의 몫이오, 돈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눈으로 감상하는 그림의 떡이오, 값비싼 권연(卷煙) 대신 종이로 말아 피우는 장수연인데도 돈이 없어 사 피우지 못하고, 대원들은 뱃속에서 나는 “쪼르륵” 소리를 들으며, 인절미와 담배를 보고도 마른 침만 삼키며 발길을 돌니니 장사는 되지 않는다.
숙직실 앞에선 방위군 대원이 몸에 지녔던 물건을 돈과 바꾸려고 북적거리는데 돈 되는 물건은 하나도 없고, 겨울철 오후의 스산한 날씨 속에 허리를 구부리고 몸을 웅크리며 교정(校庭)을 배회하는 모습은 춥고 배고픈 군상으로 처량하게 보인다.
매점과 물물교환장소를 기웃거리던 대원들은, 운동장이나 공터를 배회하며 씀바귀나 냉이, 쑥과 질경이를 뜯어서 날(生)로 먹으며 비어 있는 창자를 채우는데, 어떤 대원은 소화가 안 되어 2,3일을 화장실에 들락거리다 탈진하여 자리에 눕는다.
용산초등학교에 근무하던 한(韓相薰) 선생은 운동장이나 공터를 배회하며 나물을 뜯어 빈창자를 채우려는 행동이, “위신이 깎기고, 체통이 안 서는 천박한 행동이다”라고 하며,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라고 들나물(野生草)을 뜯어 빈창자를 채우려는 대원들을 외면한 채, 홀로 교실에 남아 벽에 기대어 졸다가, 기운이 없다고 교실 바닥에 눕더니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중대본부에서 자리에 누워있는 한 선생을 치우라고 막걸리 한 동이와 광목 한 통이 나왔는데, 사역을 자청하는 대원이 10명도 넘는다.
아침이면 밤사이 유명(幽明)을 달리 한 대원의 시신(屍身)이,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 실려 밖으로 나가는데, 그 광경을 보는 대원들은 나도 곧 저와 같은 신세가 되리라 생각하며, 담담한 표정으로 시신을 전송한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밤이 깊어가며 취침나팔소리가 들리면, 교실 바닥에 침구를 깔고 공동으로 이불을 덮으며 누워서 두런거리던 속삭임도 잠잠해지고,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는데 나는 등이 가렵고 굼실거려 잠들지 못하고 살며시 일어나선, 졸고 있는 불침번 앞을 지나 교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온다.
직원변소로 통하는 복도 전등불 밑에서 내의를 벗어 뒤집어 보니, 이(虱)가 하얗게 재봉선 상에 줄지어 붙어있어, 손톱으로 죽이지 못하고 내의를 훌훌 털면, 콘크리트로 된 통로 바닥엔 이가 하얗게 떨어지고, 농구화 신은 발로 이를 비비면 모두 죽는데, 나는 살겠다고 사람 몸에 기식(寄食)하는 곤충인데 하고 연민(憐憫)의 정을 느낀다.
내 옆에서 침식을 같이 하던 김(金三鳳) 선생은 나이가 40으로, 서울 동구여상(東丘女商)에서 역사를 가르쳤는데, 부인과 12살 난 아들과 9살 된 딸을 남겨둔 채,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고성까지 남하 했다.
부인이 남매를 이끌고 피난길에 오르며, 대구와 부산, 마산을 거쳐 한 달 만에 고성 농업학교에 수용된 남편을 찾아내고 면회신청을 했는데, 부인과 면회를 한 김 선생은 교실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안사람이 면회를 와서 가족과 같이 저녁을 먹고 오겠다”라며 교실을 나가더니 해가 지고 날이 어두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매일같이 오전엔 오락회요, 오후엔 제식훈련이 반복되니, 내겐 전선으로 실려 갈 날을 기다리는 대기시간도 지루하게 느껴지고, 간혹 토끼몰이를 위해서 영외(營外)로 나갈 때는 산 밑 초가집에 사는 어린이가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을 보면, 자유가 없는 내 처지와 비교되어 그 어린이의 처지가 부럽게 느껴지고, 야산에서 전개하는 토끼몰이는 수렵물(狩獵物)이 없어도 내겐 아직까지 살아서 움직인다는 현실을 확인시켜 주며,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인다.
주간엔 제식훈련과 군가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면 불침번과 위병근무로 군인이 하는 내무생활을 본 따서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날이 밝으며 위병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원이, 교육대장이 세 들어 사는 위병소 앞 길 건너 기와집 사랑방에서 흘러나오는 ‘맘보가락’의 유성기(留聲機)소리와 ‘사각사각’하고 치마 끌리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남하한 ‘국민방위군’인데, 같은 방위군으로 사령부에서 임명된 교육대장은 젊은 여자(酌婦)의 손을 잡고 춤을 추며, 양단치마저고리에 오이씨 같은 버선을 신은 젊은 여자는, 교육대장 손을 잡고 아랫목이 검게 끄슬린 장판방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상상하며, 서울에 두고 온 가족의 안부를 몰라 피가 마를 지경이라고 옆에 있는 대원에게 호소한다.
오전(1951.3.18)에 서울에서 연희대학교에 다니다 6•25사변이 발발하자, 방위사관학교를 졸업한 중대장(林春在)이, 푸른 작업복 상의 옷깃에 무궁화 잎 하나의(防衛軍 少尉) 계급장을 달고, 민주주의를 옹호하자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는데, 민주주의를 옹호해야 한다며 흑판에 글씨를 쓰려다 돌아서선, “옹호하자는 옹(擁)자의 한자(漢字)를 모르는데 누구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드시오” 라고 하는데 누구 하나 손드는 사람이 없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드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드니, 중대장은 앞으로 나와 흑판에 옹(擁)자를 쓰라고 해서, 앞으로 나가 단상으로 올라가 흑판에다 옹(擁)자를 쓰니, 앉아 있던 대원들이 어린 내가 어려운 한자(漢字)를 안다고 두 손 들고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장정을 제2국민병으로 소집하여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군적에 편입시켜 남쪽으로 집단 후송하는 과정에서, 사령부의 방위군 장교들이 후송을 위해 배당된 예산(24억원)과 양곡(5만2천석)을 횡령한 비리가 들어나자 비리를 규탄하는 국민의 여론이 비등하고, 국회에선 ‘국민방위군’의 해산을 결의(1951.4.30)한다.
‘국민방위군’이 해산(1951.5.12)하자, 대원들은 쌀 2말과 귀향증(전시엔 당국에서 발행하는 여행증명서 없이는 지역간 이동이 불가능했음)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불 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거지같은 귀향장정이 광대뼈만 불거진 얼굴로 허기진 배를 움켜쥔 채 민가를 기웃거리고, 신작로엔 움직이는 해골의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정부 당국에선 모든 차량은 국민방위군 귀향장정을 승차 시켜 목적지까지 수송하고, 민가에선 방황하는 귀향장정을 투숙시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를 하고, 날이 저물면 기차역 집찰구엔 행정관청의 공무원이 나와 귀향장정을 집합시켜 민가로 안내한다.
저녁때 기차를 타고 ‘전주역’에 내리니, 집찰구에서 대기하던 시청 공무원이 우리 일행을 불러 세운다.
50여명의 대원들은 2,3명이 1개조가 되어 시내 각 가정으로 배치하는데, 우리 일행이 배치 받은 집은 정원(庭園)이 있는 큰 집으로, 우리를 맞이한 남자 주인은 정원 앞에 있는 사랑방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편히 쉬라고 하며 밖으로 나간다.
저녁에 방으로 찾아온 남자 주인은, 50대 초반으로 차림은 학교 선생같이 보이는데, 나라를 지킨다고 집을 떠난 장정들이 객지에서 고생이 많다고 위로를 하며 찾아온 용무를 말하는데, “서울 사람들은 전라도사람을 ‘개똥쇠’라고 부르며 무시 하는데, ‘쇠’란 남을 낮춰 일컫는 말로서 이번에 전주에 오셨으니 진실을 파악하고, 서울로 돌아가선 인식을 바꿔 주십시오”라고 하며, 전라도사람이 무시당하는 역사적 유래를 설명한다.
“‘개똥쇠’란 어원(語源)은 전라도 지역의 흙이 모두 개땅(진흙)으로 되어있어, 개땅 지방에서 사는 사람이란 말이 ‘개똥쇠’로 와전된 것이고, 전라도사람을 믿지 못한다고 경원시(敬遠視) 하는 것은, 고려태조 왕건(王建)이 임종(943.4)을 앞두고 심복인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치정(治政)에 참고하라”고 훈요10조(訓要十條)가 적힌 유언장을 줬는데, 그 유언장에 적힌 내용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금강(錦江) 이남의 산세와 지형이 배역(背逆)의 형상이라,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은 지형을 닮아 언젠가는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반기를 들을 것이니, 정부의 요직엔 전라도사람을 앉히지 말라고 유언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이후론 전라도사람이 정부의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이씨왕조와 일본의 식민지통치를 거쳐, 조국이 대한민국으로 독립된 지금도 전라도사람을 경원시 하는 사고가 남아 있다고 한다.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며 오산(烏山), 장호원(長湖院), 제천(提川), 영월(寧越), 삼척 (三陟) 등 도시를 연하는 선까지 밀리던 국군과 UN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38선 이남으로 철군한 지 43일(1951.3.18)만에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여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하니, 이에 당황한 소련정부에선 UN대사 “마리크(Marlk)”에게 한국전쟁의 휴전을 제안(1951.6.23)하도록 지령하고, “마리크”가 휴전을 제의하여 미국이 이에 호응(1951.7.8)함으로서 정전회담이 시작된다.
정전회담에서 현 전선이 휴전선이 될 것이란 쌍방의 합의로, 지형이 평탄한 서부전선을 맡은 UN군은 소극적인 전투로 전선이 38선 이남으로 형성되고, 지형이 험난한 동부전선을 맡은 한국군은 적극적인 전투로 전선이 38선 이북으로 형성된다.
정전회담을 시작할 때는 전쟁의 주도권이 UN군에 있었고, 피차의 전력이 비슷(UN군:54만 7천여 명. 공산군:57만 9천여 명)해서 쌍방은 정전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정전회담 기간(1951.7~1952.10) 중에 UN군사령관(Mark W. Clark 미육군대장)은 정전의 성사를 위해 일체의 군사행동을 금지시켰으나, 중국의 “모택동”은 전투행위가 없는 틈을 타서 군사력을 증강시켜 피아의 전력이 역전(UN군:71만여 명. 공산군:106만여 명)되자 전쟁의 주도권을 공산군이 장악하고, 정전회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회담 개시 426일 만인 1952년 10월 8일, 중공군 대표는 ‘포로송환문제’로 UN군과 의견이 대립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회담을 결열 시킨다.
UN군사령관은 공산군 대표가 회담장소로 복귀하여 정전회담이 재개되고, UN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회복하고자 정전회담이 결렬된 다음날, 정전의 성사를 위해 중지시켰던 전투행위를, 미제8군사령관(James A Vanfleet 미육군대장)의 건의를 받아드려 재개하도록 허락하고, 미제8군사령관은 한국군 제2사단장(丁一權 陸軍中將)에게 ‘오성산’ 앞 ‘저격능선(狙擊稜線)’으로 진출한 중공군의 전초진지를 공격하라는 명령(1952.10.9)을 내린다.
‘오성산(1062)’은 강원도 김화(金化) 북방(7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원, 김화, 평강을 잇는 3각지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높은 산으로 중공군 제15군 제133연대가 진출하고 있으며, 그 남쪽에 있는 ‘저격능선’은 김화를 방어하고 있는 국군 제2사단 주저항선 전방(북쪽) 500m거리에 있는 해발 580m에 1km평방키로 미터 넓이의 능선으로, A.B.C고지로 구성된 이 능선은 ‘오성산’에서 남쪽 1.5km지역에 있고, 주봉 A고지(580) 북쪽 50m지역에 B고지가 있으며, B고지 북쪽 300m지역에 C고지가 있고, C고지 북쪽 1.5km지역에 ‘오성산’이 있다.
‘오성산’ 남쪽 ‘적격능선’은 중공군 제133연대의 전초진지가 있는 곳으로 전술적으론 중요하지 않으나, 전략적으론 피아의 전력(戰力)을 내외로 과시하기 위해 공방을 되풀이하는 고지다.
서부전선은 조용한데, 동부전선에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피아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며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정부에선 전투부대의 전투력이 약화되자 젊은이가 있는 가정에 붉은 사선(斜線) 2줄이 그어진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발부하고, 거리를 왕래하는 젊은이는 헌병과 순경에 연행되어 집으로 연락할 기회도 주지 않고 훈련소로 보내며,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육군 제1훈련소에서 양성 배출하던 신병의 숫자가 부족하자, 충남 논산에 육군 제2훈련소를 신설(1951.11.1)하여 신병을 양성 배출한다.
학교로 복귀(1951.7.15)한 나는 애송이 선생이란 허물을 벗고, 3학년 담임에서 고학년인 5학년 여자 학급을 담임(1952.1.10)하고 있는데, 판문점에선 UN군 대표와 공산군 대표 간에 정전을 논의하고 있으니, 전선에서 포성이 멈출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하고, ‘국민방위군’의 병역을 마쳤으니 군대와는 무관하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주위의 젊은이들에게 차례로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나오고, 나에게도 제2국민병 소집영장(1952.2.1)이 또 나온다.
논산 육군제2훈련소(所長 咸炳善 陸軍中將), 제21연대(聯隊長 具明會 陸軍大領), 제6중대(中隊長 尹炳俊 陸軍中尉)에서 2개월간, 군가(軍歌)와 불침번 등 군대의 내무생활과, M-1소총의 분해결합과 사격훈련, 철조망 밑을 통과하는 침투훈련과 자동소총의 조작법, 화생방 교육과 각개전투 등 군인의 기초와 상식을 익힌 나는 후반기로 넘어간다.
신병의 대부분은 모두가 20대 전후로 식민지시대에 출생하여 일본의 우민정치(愚民政治)로 문맹이 많아서, 유식(有識)한 신병을 선발하여 현대식 무기를 다루는 특과학교로 보내고 나면, 후반기 교육은 보병의 중화기 조작법을 익히는 단순한 교육이라 무식자도 훈련을 극복할 수 있어서, 후반기 교육을 받는 훈련병은 대부분이 무식(無識)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常識)이다.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 위치한 제26연대 제18중대(中隊長 李鍾鉅 陸軍大尉)에서 박격포와 무반동총, 기관총과 총유탄 등 중하기의 조작법을 배우고, 토요일(1952. 6.21) 오전에 훈련소 배출대대를 출발하여, 춘천 보충대를 거쳐 다음날 오후에 강원도 김화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는 보병 제2사단, 제17연대(聯隊長 殷碩杓 大領), 제1대대(大隊長 姜斗馨 少領) 제5중대(中隊長 金宰東)로 배치 받는다.
새로 보충된 신병들은 대부분이 문맹인 병사 속에, 보기 드문 중졸의 학력을 인정받은 나는 행정반에서 근무하라며 공급계 조수로 임명되고, 대대 예비대로 후방에서 부대정비를 하던 우리중대는 연대로부터 중공군 전초진지를 공격 점령(1952.10.15)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연대 공격명령에 따라 우리는 밤중에 전선으로 이동하여 공격대기지점에 도착하자마자 각자가 들어갈 산병호를 파서 작열하는 포탄의 파편을 피하고, 동트는 새벽에 공격개시선을 넘어 A고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다.
공격개시 전에 아군의 105mm 포탄이 목표를 강타하고, 공격개시 시간이 되자 중대장은 포격을 연신(延伸)하고, 제1,2소대가 공격부대로, 제3소대가 예비소대로 목표 점령을 위해 공격개시선을 넘어 능선을 따라 전진을 하는데, 작열하는 포탄으로 전사자와 전상자가 속출하고, 전상자는 스스로 고지에서 하산하지만 전사자는 후송 할 병력이 없어 공격하던 전우가 전사자의 대검 달린 M-1소총을 거꾸로 꽂아 철모를 얹어 놓곤, 전사자가 있다는 표시를 하고 공격을 계속한다.
행정반에서 공격부대의 뒤처리를 하던 인사계(高龍洙 上士)가, 공급계 김(金智煥) 중사(병장)와 나를 불러 집결지에 취사장을 설치하여 식사문제를 해결하고, 전사자와 전상자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대대에선 전사자 시체를 한 구도 손실 없이 대대로 후송하라고 전화로 독촉한다.
중대는 정오가 넘어서야 고지를 점령하고, 연대본부에선 노무대원 6명을 중대로 보내는 데, 나는 취사장에서 소금물로 빚어 만든 주먹밥을 카빙소총탄통에 담아 노무자로 하여금 고지를 점령한 중대로 가져가서 소대별로 분배하도록 운반케 하고, 고지를 내려오는 길에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여 집결지로 운반하도록 지시를 한다.
우리 중대의 공격으로 중공군은 C고지에 소대규모의 병력만 남겨둔 채 주력은 북쪽에 위 치 한 ‘오성산’으로 후퇴하고, A고지를 점령한 우리 중대는 진지를 보강하고 중공군의 역 습에 대비한다.
행정반에서 공급계 조수로 임무를 수행하던 나는, 중대가 A고지를 점령하자마자 제1소대 기관총 사수로 임명되고, 제1소대는 전초소대 임무를 띠고 앞(50m)에 있는 B고지에서 중공 군의 접근을 감시하도록 명령 받는다.
B고지엔 8부 능선을 따라 깊고 길게 파여진 교통호가 있어, 진지에 투입된 장병은 허리를 꼬부리고 이동을 하며, 소대원은 교통호에 엎드려 중공군의 접근을 감시하고 있다.
‘오성산’으로 후퇴한 중공군은, ‘저격능선’에서 한국군을 몰아내는 것이 급선무라, 캄캄한 야음(1952.10.30)에 우리가 감시하고 있는 B고지를 우회 좌측 계곡으로 침투하여 A 고지를 점령하고, ‘오성산’ 턱 밑에서 중공군의 접근을 감시하던 우리 소대는 본대와 이 어지는 접근로를 차단당한 채, 후속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는다.
깊은 밤이지만 전선은 작열하는 포탄으로 대낮같이 밝으며, 공격하는 중공군의 검은 그림자가 앞으로 올라오고, 올라오던 검은 그림자가 쓰러져도 뒤따르던 검은 그림자는 쓰러진 검은 그림자의 물체를 밝고 기어오는데, 내가 쏘는 기관총과 병사들이 쏘는 M-1소총은 불을 뿜어대고, 105mm포탄이 앞에서 수 없이 작열해도 중공군의 검은 그림자는 계속 올라온다.
꼬불꼬불 길게 뻗은 교통호 벽엔 병사들이 엎드려 다가오는 중공군에게 M-1소총을 난사 하고, 깊게 파여진 교통호의 마른 땅바닥이 군데군데 젖어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우리 소대원이 쓸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피 묻은 건빵봉지가 여기저기 나둥글어 교통호는 어지럽다. “쾅”하고 포탄이 작열 하는 순간, “아이쿠” 하고 교통호 벽에 엎드려 사격하던 이(李相根) 하사(상등병)가, 주저앉더니 옆으로 쓰러진다.
나는 “이 하사!”하고 옆으로 쓰러진 이 하사를 안아 일으키며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이 하사 가슴에서 흐르는 피구멍을 막는데, 이 하사는 고개를 숙이며 숨을 거둔다.
이 하사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나도 스물둘(22)의 피어보지 못한 꽃봉오리가 강원도 김 화 전선에서 진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얼굴들이 하나둘씩 눈앞을 스쳐간다.
곤색 교복에 흰색 칼라의 신광여중(信光女中) 5학년이라는 “조경자(趙慶子)” 학생을 일요일 오전에 을지로 4가에 있는 국도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만나면 점심을 같이 하며 속마음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는데, 동족상잔의 6.25사변이 앞을 가로막으며, 또 하나의 얼굴이 겹치는데, 자유로운 복장인 초등학교 학생을 이성(異性)으로 대하기는 나이가 어리지만, 나를 좋아하고 따르던 담임학급의 학생 “김석원(金錫元)” 얼굴이다.
나는 삶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순간에, 20여년을 길러주신 어머니 얼굴대신, 한두 번 만나본 조경자 학생과, 자신을 따르던 김석원 학생 얼굴이 떠오른데 대해서, 납득 할 수 있는 변명을 찾지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소대장 김(金淳秀) 소위가 오른쪽에서 허리를 꾸부리며 다가와선, “모두 동굴진지로 철수하라”라고 외치며 좌측 동굴진지로 사라진다. 교통호 왼쪽 끝엔 유사시를 대비한 10평방미터 넓이의 동굴진지가 있으며, 사람이 서서 다닐 수 있는 높이의 동굴진지 벽은 4면을 참나무로 총총히 박아놓고, 천정도 참나무를 깔고 2m정도를 흙으로 덮어서, 판자로 된 출입문을 닫으면 사람의 출입이 불가능하고, 소대장 김 소위가 출입문 옆에서 구형(矩形)으로 된 총구를 통해서 바깥 동정을 살필 뿐, 포화(砲火)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요새다.
B고지 능선을 기어오르던 중공군의 후속부대도, 아군 포병이 쏘는 105mm포탄의 작열과 기관총사격, M-1소총의 난사로 수많은 전사자를 남긴 채 공격을 단념하고 ‘오성산’으로 후퇴하자, A고지를 점령한 중공군의 주력부대는 고립되고, 진지를 정비하느라 날이 밝았어도 소리 없이 조용하다.
나는 갈매기 둘의 계급장을 단 하사(상등병)로 행정반에서 투입된 기관총 사수지만, 갈매기 하나의 일등병 계급장을 단 “영재(朴榮在)”는 기관총 부사수로, 나는 전선의 분위기를 익힌 고참병 소리를 듣지만, 영재는 후방에서 보충된 신병 소리를 듣는다,
내가 “자냐?”하고 고개를 돌리며 총상(銃床)에 머리를 묻고 있는 영재에게 속삭이자, 영재는, “예, 안 잡니다”라고 대답하며 총상에서 부스스 상체를 일으킨다.
“자지 마, 날이 밝았으니 곧 중공군이 나타날 시간이야”라고 말하며, 나도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어른스럽게 영재에게 속삭인다.
“박 하사님,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중대 방어진지가 저희들 수중에 있으니, 전방으로 나와 있는 이 전초소대는 안중에 없는 것 아닙니까?” 하고 영재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그러니 적이 오나 잘 보란 말이다, 중대 관측소가 떨어지고 중공군의 재편성이 끝날 시간이라, 날이 밝았으니 지금쯤은 고지를 점령한 주력부대나, ‘오성산’으로 후퇴한 후속부대나 다음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 한다”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네 지금?” 하고 영재는 내가 한 말을 되씹는다. “그래 이제부턴 중공군이 나타나면 진지 밖으로 나가 총검으로 찌르고 찔리는 백병전을 벌이던지, 작열하는 포탄이나 중공군이 던지는 수류탄에 맞아 죽는 일만 남아 있어” 하고 나는 영재 말을 담담하게 받아 넘긴다.
아침 햇살을 가슴에 안고 능선을 오르는 중공군의 그림자 하나가 총구를 통하여 내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따라락...,따라락...,” 하고 기관총 방아쇠를 단기는 데, 기관총 소리의 장단에 맞춰, “시쿵...,시쿵...,쾅...쾅” 하고 공중에서 포탄이 작열 한다.
“박 하사, 박 하사, 이상 없나...박 하사!?” 하고 동굴진지 입구에서 중공군의 동태를 감시하던 소대장의 외침이 들려오자 나도 오른쪽에 대고, “예, 이상 없습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친다.
“알았다, 아군의 TOT사격(진내에서 포탄의 공중폭발)이다. 정신 바짝 차려라, 곧 기쁜 소식이 있을 거다” 하는 소대장의 들뜬 외침이다.
“아군의 TOT사격”이라는 소대장의 외침이 귓가에서 되살아나는 순간, 나는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리며 상대방의 총칼에 찔리기 전에 내가 먼저 찔러야 한다는 긴장이 풀리며 가물가물 하고 멀어지는 의식 속에, “시쿵...,시쿵...,쾅...,쾅”하는 포탄소리가 포근하게 들리며 눈이 스르르 감긴다.
집결지로 철군한 우리 중대는 제3소대 ‘선임하사(陳基連 1等中士-하사)’가 특공대(10명)를 조직하여 아침 일찍 주간공격을 감행하여 오후가 넘어서야 고지를 탈환하고, 중대가 다시 방어를 하며, 우리 소대도 A고지로 통하는 접근로가 뚫리고 본대와 연락이 회복된다.
나는 기관총 사수로 있으면서 하사(상등병)에서 2등중사(병장)로 진급하고, 사병의 신분에서 하사관대열로 끼어든다.
아침 햇살이 엄폐(掩蔽)된 기관총 진지의 총구를 눈부시게 비치고 있는데, 기둥에 걸린 TS-10(배터리 없는 야전 휴대용 송수화기)에서 “1소대..., 1소대” 하고 소대원을 찾는다.
내가 TS-10송화기에 대고, “감 잡았다. 보내라”하고 응답하니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박 중사님이 대대본부에서 치른 갑종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전남 광주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됐습니다. 사물(私物)을 가지고 11시까지 대대본부 인사과로 출두 하십시오”라는 중대본부 교육계 이(李東鎭) 하사(상등병)의 전화다.
중대에선 인사계와 소대 선임하사 등 고급하사관이, 갑종간부후보생 모집 때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길은 죽는 자리를 피하는 일이라며, 육군본부 고급부관실(인사운영감실)에서 나온 모병관(일등상사)이 실시하는 간부후보생 시험을 피해서 자리를 비우는데, 나는 임관되면 소대장으로 부대 선두에서 소대원을 이끌고 적이 방어하는 고지를 오르며 돌격지점에 당도하면, “돌격 앞으로”하고 오른손을 높이 드는 순간, “딱콩”하고 적의 저격병이 쏘는 총탄에 쓰러질 줄 알면서도, 중대장의 엄명(嚴命)이라 대대본부에서 단독으로 치른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로, 서둘러 사물을 챙기고 육군보병학교로 가기 위해 고지에서 내려온다.
토요일(1953.4.4) 오후에 각 사단출신 하사관 50여명과 같이, 첫째 칸엔 공비(共匪)의 습격을 대비해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 1개 분대를 태운 군용열차를 타고, 야간에 강원도 춘천역을 출발하여 밤새 달려 다음날 아침에 전남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 10리길을 걸어서 상무대로 향한다.
육군보병학교(校長 崔 錫 陸軍少將)에선 장교를 양성 배출하기 위해 1개 연대(聯隊長 金應伯 大領) 2개 대대, 12개 중대로 교육연대를 편성 6개월의 교육 훈련을 실시해서 매 2주마다 200명 내외를 배출하던 신임장교(新任將校)를, 전선에서 소대장의 소모가 많아지자 비어있는 자리를 채워달라는 일선부대장의 요청에 따라 연병장에 천막을 치고, 1개 대대를 증설하여 현역부대와 훈련소에서 보내오는 간부후보생을 수용하여, 매주 장교를 배출하기 위해 교육훈련을 실시한다.
나는 갑종간부후보생 제57기로 제3대대(大隊長 洪鶴杓 陸軍少領), 제오중대(中隊長 姜貞綾 陸軍少領), 제2구대(區隊長 慶貴鉉 陸軍中尉) 소속으로 편성되어 교육훈련이 시작된다.
거리를 왕래하는 시민들은 작업모에 육군소위 계급장을 단 장교를 만나면, 계급장이 동판에 밥풀 하나를 부친 것과 같다고 해서, 장교라는 영광보다는 전선에서 부대를 이끌고 적이 방어하는 고지를 오르며 돌격선에 도달하면, “돌격 앞으로” 하고 오른손을 높이 드는 순간, “딱콩” 하고 적 저격병의 저격을 받아 쓰러질 몸이라고 해서, ‘하루살이’, 혹은 계급을 무시한 ‘밥풀떼기’, ‘소모(消耗)소위’라고 부르며 동정을 한다.
상황이 급할 때는 전선에서 소모되는 소대장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200여명의 후보생이 토요일의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고, 상무대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전선으로 직행하여 비어있는 소대장 자리를 메우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1953.3.8)하며 세계정세가 변화하자, 중국의 “모택동”은 승산(勝算) 없는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정전을 결심하고, 정전을 해야 한다는 본국의 정책을 정전회담 중공군 대표(彭德懷)에게 전달하니, 중공군 대표는 회담의 재개(1953.4.6)를 UN군에 요구하고, 회담 결렬 182일 만에 양측 대표가 판문점에 다시 모여 합의를 보지 못한 의제 제4항 ‘포로송환’문제를 토의한다.
한국정부에선 정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고, 육군보병학교 교실에선 교관이 M-1소총의 성능을 가르치며 후보생의 전기(戰技)를 연마(硏磨)하여 전투에 대비하고 있는데, 위병소 앞에선 매일같이 시민이 ‘푸래카드’를 들고 정전반대 시위를 하고, 조야(朝野)가 하나같이 정전을 반대하는 가운데 판문점에선 UN군 대표와 공산군 대표 사이에 정전을 논의한다. 정전회담(1953.7.21)에서 쌍방 대표들은 의제 제4항 ‘포로송환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고, 중국의 “모택동”이 합의사항에 동의하며, UN군사령관(Ridgeway미육군대장)이 합의사항을 승인하자, UN군 대표와 공산군 대표들은 7월 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고, 동족상잔의 6.25사변이 발발 한 지 3년 여 만에 정전이 되며 전선에서 포성이 멈춘다.
당국에선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정책을, 포격과 폭격으로 건물의 잔해만 남은 도시의 재건과 토탄에 빠진 민생을 안정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하고, 신임장교(新任將校)도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10일간의 휴가를 보내도록 군사정책을 변경하니, 나도 졸업식(1953.9.19)을 마치곤 10일간의 휴가를 즐기려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忠南禮山)으로 내려간다. 전쟁 중엔 육군소위는 ‘하루살이소위’라고 비하(卑下)하던 대명사가, 정전이 조인되고 전선에서 포성이 멈추니, ‘국제신사’라는 대명사로 바뀌며 사회에서 귀한 존재로 부상(浮上)한다.
보충설명:6•25사변 때는 사병의 신분을 병(2등병, 1등병), 하사(상등병), 하사관(병장, 하 사), 고급하사관(중사, 상사, 원사) 등으로 분류하였음.
참고도서: 한국전쟁 개요(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발간).
한굳사 대사전(교육도서 발간).
1. 정전회담의 의제 및 합의사항.
(1). 협상제목 채택
(2). 군사분계선의 설정
(3). 휴전 감시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4). 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
(5). 쌍방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2. 국민방위군:전시 또는 사변에 있어서 병력동원의 자원을 확보하고, 배출의 신속을 기하기 위해서 설치 조직된 군대임.
3. 국민방위군사건:1950년 12월 21일 공포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신설한 방위군을 후송하는 과정에서 반위군 갑부들이 국고금 24억원과 양곡 5만2천석을 횡령하여, 1950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은 해산하고, 사령관 김윤근(金潤根) 육군준장과 방위군 대령 등 4명이 총살 된 사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