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노병의 독백 - 첫사랑

[9] 노병의 독백 - 첫사랑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9] 노병의 독백 - 첫사랑

0 2,814 2003.08.1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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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노병의 독백 - 첫사랑

나무를 지고 동네가 보이는 등성이를 넘자니 숨이 차며 나뭇짐이 어깨를 누른다. 눈앞에 산등성이가 다가오니 마음만이 앞으로 나갈 뿐 발은 제자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먼저 올라간 관호(金寬鎬)가 산등성이 묘지 앞 양지바른 곳에 “쾅”하고 지게를 받쳐놓고 “후유우”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무명 적삼을 훨훨 벗는 다. 고갯길이 험하다 해도 보릿고개보다는 넘기가 수월하다.

여름에 논에 나가 김을 매며 해가 길고 지루해서, 허리를 펴며 서산에 지는 해를 눈으로 끌어 내리던 여름 해보다는 겨울 해는 너무도 짧다.

아침 상머리에서 콩 섞인 보리밥 한 사발을 게눈감추듯 먹어치우고, 이웃집 관호하고 30리 떨어진 가야산까지 먼산나무를 가서, 마른 솔가지를 주워 지게에 지고 일어섰을 때는 해가 동쪽에 있었는데, 30리 산길을 타고 오니 해는 서산에 기운다.
 
상호는 부엌에 때고 사랑방에 지필 나무가 필요하지만, 관호는 사정이 다르다.

먼산나무를 다시 손질해서 다음날 열리는‘한내장’에 나가서 돈으로 바꿔 쌀을 사고 남은 돈은 가용에 보태야 한다.

요행이 살 사람을 잘 만나면 700환이나 800환을 받지만 살 사람을 못 만나면 나무를 지고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농촌에선 봄에 다가오는 보릿고개를 근심걱정 없이 넘기고, 겨울엔 아랫목이 지글지글 끌어야 상지상(上之上) 팔자요, 부러움의 대상이다.

부엌에 나뭇짐을 부리고 대문을 나서는 데, 언제 나왔는지 길 건너 논둑 아래 공동 샘에서 영숙이가 보리쌀을 씻고 있다.

동네 큰 길이 샘 둑으로 나 있으니, 안터 상구네를 가려면 영숙이 보리쌀을 씻는 샘 논둑길을 지나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모른 체 하며 영숙이를 훔쳐보니, 영숙이도 보리쌀 씻던 손을 멈추고 논둑 위를 쳐다보며 방끗 웃어준다.

지난여름이다.

건너 마을에 사는 6촌 형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상호야, 너도 속으로만 영숙이를 좋아하지 말고, 네 속마음을 겉으로 내 놓아야하겠다”하고 아침 일찍 집에 들른 6촌 형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상호 혼인 말을 꺼낸다. “네가 좋아하는 것은 영숙이와 영숙이 오빠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네가 좋아한다고 하지 않으니, 영숙이와 혼인을 못할까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다”하고 6촌 형이 정색을 한다.

상호도 겉으로 내놓고 영숙일 좋아한다고 하고 싶지만, 동네에서 큰 집 으로 소문난 영숙이네와, 농촌에서 농사도 못 짓는 비농가(非農家)요, 장사꾼인 상호가 감히 영숙일 좋아한다고 말하긴 어려우며, 영숙일 좋아 한다는 소문이 나면 자신의 푼수도 모른다며 동네 사람의 지탄(指彈)과 웃음꺼리가 되고 따돌림을 당할 것이다. 6촌 형과 혼담이 오간 것은 지난여름이다.

눈앞에 얼른거리는 영숙이 모습에서,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 하얀 앞치마를 두른 새색시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환상을 떠올리며 상호는 얼굴을 붉힌다. “싸악...,싹”하고 보리쌀 씻는 소리도 정답게 들리며, 귓가에 늘어진 귀밑머리가 예쁘다.

며칠 뒤의 일이다. 이 조그마한 충청(남)도 산골에 큰 일이 벌어졌다. 영숙이가 서울 총각과 맞선을 본다고 한다.

첫사랑

속마음을 털어놓고 적극적으로 나오라던 6촌 형의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흘러 넘겼더니, 엉뚱한 곳에서 진담으로 나타난다.

이럴 줄 알았 으면 6촌 영에게 속마음을 알리며, 영숙이와 혼인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 달라고 사정을 할 것을 하고 후회가 앞선다. 아직까지 맞선이라곤 말로만 듣던 충청(남)도 산골에, 서울 총각이 맞선을 보겠다고 찾아왔다.

시골 사람은 혼인과 잔치는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오, 신랑과 신부될 사람은 부모의 결정에 따라 소문을 믿거나, 먼발치에서 결혼 상대자의 인물 됨됨이를 확인하는 것이 혼인의 준비 작업이라고 알고 있는데, 서울 총각이 영숙이와 맞선을 보겠다고 마을로 찾아왔다. 맞선이란 도회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술어인 데 시골서 자란 영숙이가 맞선을 허락한다.

지금은 신문이나 주간지, 생활 정보지에도 결혼 광고가 게재되고, 결혼 이란 애정으로 사는 것이오, 서로가 성격의 차이가 있으면 갈라서고, 다시 성격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오, 당연한 행동으로, 좋은 유전자가 결합되면 우수한 2세가 출생하는 것인 데, 50여 년 전에는, “결혼이란 법으로 하는 것이오, 알음알음으로 부모가 결정한 혼인은 죽을 때 까지 가지고 가고, 남편이 소금 짐을 물로 끌라면 끌어야한다”라고 믿으며 유전자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이혼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만 있는 단어다.

시골 총각은 정초에는 명주 바지요, 추석엔 무명 양복바지가 고작인 데, 서울총각이 입은 양복은 마카오에서 수입한 원단으로 재단한 양복을 입었다고 해서 마카오 신사로 불리며, 마카오 신사는 세련되고 멋쟁이로 보이며 시대를 앞서 가는 젊은이로 보인다.

노병은 말한다

서울 총각은 영숙이를 데리고 ‘한내장’에 가서 머리를 ‘파어머넌트웨이브’로 지지고 금팔찌를 손목에 채워준다.

 며칠 뒤 잔칫날이 돌아왔다. 오(午)시에 혼례를 올린다는 데, 영숙이네 집에선 아침부터 마당에 멍석을 깔고 차일(遮日)을 치며 초례청(醮禮廳)을 준비한다.

오시가 되자 동네 사람이 모여들고, 신랑은 양복 위에 관복을 걸치고, 머리에 사모를 쓰고, 허리에 관대(冠帶)를 두르며, 목화(木靴)를 신고 초례청 들어서고, 신부는 노랑 양단저고리와 다홍치마 위에 원삼을 걸치고, 머리에 족두리와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올케 손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온다.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신랑 신부가 마주 서고, 결혼 진행자가 읽어 내려가는 홀기(笏記) 순서에 따라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고, 술잔이 오간다.

상호는 자기가 설 자리에 서울 총각이 섰다고 생각하며 신부 표정을 살펴보나, 환한 표정에서 기대했던 슬픈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결혼식이 끝나고 영숙인 동네 사람을 뒤로 한 채 택시를 타고 서울로 시집을 간다.

생긋생긋 웃어주던 영숙이 동네에서 사라지니, 상호는 자기 식구가 될 사람을 서울 총각에게 뺏겼다고 생각되어 가슴은 허전하다.

이웃집인 상연네 사랑에선 동네 머슴이 모여서  집신을 삼으며, 서울 총각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가을은 가고 겨울이 지나 봄이 오니, 논 팔아 영숙이 손목에 금팔찌를 채워 주었으면 사랑하는 애인을 서울 총각에게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머슴들 조롱도 잠잠하고, 상호 머리에서도 영숙이 환상이 지워질 무렵이다.

첫사랑

장꾼을 태운 버스가 “덜커덩”하고 동네 입구에서 멈추더니, 한 무리의 장꾼이 버스에서 내리는 데, 세련되게 화장을 한 젊은 여인도 따라 내린다.
 
한참을 바라보던 상호는 버스에서 내린 젊은 여인이 영숙이란 것을 깨닫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영숙인 상호와 동갑인 데도 성숙한 여인으로 비친다.

검정 벨벹 치마를 여미는 손은 희고 매끈하며, 소매 자락에 감춰진 팔목엔 금팔찌가 번쩍거린다.

노량 양단 저고리에 검은 벨벹 치마를 입은 영숙이와, 흰 무명 바지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은 상호 모습은, 상호 자신이 생각해도 서울 여인과 시골 총각으로 좋은 대조를 이룬다.

상호는 영숙이 입에서 반가운 인사말을 기대했는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영숙인 상호 존재를 무시하고 모른 체 동네 큰 길로 접어든다.
                     
집에 다니러 왔다는 영숙이 며칠이 지나도 떠나지 않자,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이 쑤군거리며 한 입 건너 두 입으로 소문이 퍼져 나간다. 본처가 있는데 시집을 갔다느니, 직업 없는 남편이 집에서 담배를 말아 시장에서 팔다가 큰집에 갔다느니, 영숙이가 금팔찌에 홀려서 서울로 시집을 갔다는 소문이다.

눈이 발목까지 내린 겨울밤은 반사하는 눈빛으로 달밤 같이 밝으며, 눈 쌓인 오솔길의 자국이 상연네 사랑방 앞으로 꼬불꼬불 뻗어있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 속 오솔길을 발로 더듬으며, 상연네 사랑방 토방에서 “탁 탁”눈을 털고 방으로 들어서는 데, 상연네 일꾼 영모가 집신 삼던 손을 멈추고 하는 말이, “서울 총각에게 사랑하는 애인을 뺏긴 사람이 방으로 들어온다”라고 빈정거린다.

노병은 말한다

이루지 못할 사랑이었다고 애써 잊고 있는 상호 가슴을 영모는 다시 한 번 흔들어 놓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시골 장을 돌면서 장사를 하였더니, 상호를 동네 사람들은 이름 대신 장돌뱅이라 부른다. 장사에는 자신이 붙었으나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여론의 형성, 물류의 유통구조와 상품의 가격 형성은 모른다.

하루는 상호네 집에 양복을 입은 청년 학생이 찾아온다.

강원도 춘천에서 농과대학에 다니던 이웃집 형이다. 나무지게를 지고 대문을 들어서는 상호를 본 형은 “야, 순자(趙順子)는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는 데 너는 농사꾼이냐”라며 나무 지게를 지고 들어오는 상호를 보고 나무란다.

상호는 순자가 동갑으로 춘천에서 살 때는 공부의 경쟁 상대였는데, 순자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닌다고 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도 학교에 가야하고, 장사를 하더라도 세상 물정을 알고 자신 있는 행동을 하고 싶어, 1947년 봄, 학비는 벌어서 충당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생각하며, 충남 합덕 장에서 팔려고 가져온 무명과 장사꾼에 필수적인 자전거를 합해서 동료 장돌림에 넘겨주고, 서울 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상호 어머닌 서울로 떠나는 아들을 보고, 학비에 보태 쓰라고 손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풀어서 상호에게 주는 데, 금반지는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상호 품에서 한 달을 머물지 못한다.

상호가 고향을 떠나던 날은 1947년 4월 3일이며, 이 날은 동네 장인 한네 장날이라 세월이 흘러도 있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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